실직하고 우연히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여기까지 떠내려온 걸까"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흔들릴 이유가 없는 평범한 아침이었는데도요. 《다가오는 것들》을 처음 봤을 때 그 아침이 생각난 건 아마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는 삶이 느닷없이 바뀔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조용하고 집요하게 묻습니다.
흔들리는 삶 앞에서, 나탈리가 선택한 것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의 전개를 일부 다루고 있으니 참고해 주십시오.
파리의 고등학교 철학 교사 나탈리는 어느 날 갑자기 두 가지를 거의 동시에 잃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가 생겼다며 이별을 선언하고, 오래 돌봐 온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수십 년을 쌓아 온 관계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나탈리가 무너지지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다음 날 아침에도 책을 펼쳤습니다. 수업을 준비했습니다. 제자를 찾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평범한 동작들이 오히려 가슴을 눌렀습니다.
감독 미아 한센뢰베는 2016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이 작품으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녀가 나탈리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위기를 극복한 여성'이 아닙니다. 변화 앞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묘한 균형입니다.
이 균형이 가능한 이유를 저는 한 가지 질문으로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나탈리는 왜 주저앉지 않았을까요? 강해서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녀를 붙들었을까요?
호접지몽과 물화, 장자가 말하는 변화의 본질
여기서 저는 아주 오래된 사상가 한 명을 불러오고 싶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입니다.
장자의 저작 《장자》에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비의 꿈이라는 뜻입니다. 장자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 깨어난 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나비 꿈을 꾼 인간인가, 아니면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가." 솔직히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너무 시적이라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우화의 끝에 '물화(物化)'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물화란 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전환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도 고정된 형태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의 내 모습은 흐르는 변화의 한 국면일 뿐이라는 시각입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장자 항목에서는 이 개념을 "사물과 자아의 경계가 유동적임을 드러내는 장자 특유의 사유"로 설명합니다.
나탈리에게 적용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끝나면서 '아내'라는 역할을 잃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딸'이라는 역할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탈리라는 사람 전체를 소거하지는 않습니다. 철학을 생각하는 사람, 학생들과 질문을 나누는 사람,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물화를 '긍정적 변화'로만 읽고 싶지 않습니다. 장자를 해석하는 시각은 여러 갈래가 있고, 물화를 낙관적 전환으로 단순화하면 그 깊이가 희석됩니다. 다만 이렇게는 읽힙니다. 지금 내가 잃은 역할이 곧 나 자신의 소멸은 아닐 수 있다고. 변화는 끝이 아니라 다른 국면의 시작일 수 있다고.

소요유, 사회가 정한 '정답'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장자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란 특정한 목적이나 고정된 가치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란 책임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기준에 자신의 가치 전체를 묶어 두지 않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삶을 꽤 좁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데 익숙합니다. 특히 이런 기준들이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성공한 삶이다
- 관계가 유지되어야 행복한 사람이다
- 나이에 맞는 위치에 있어야 정상적인 삶이다
40~50대에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도, 30대에 커리어 방향을 잃은 사람도, 20대에 취업이 늦어지는 사람도 이 기준 앞에서 한 번쯤 자신을 '낙오자'처럼 느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퇴직후 늦은 나이에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취업이 안되었을 때, 그 선택 자체보다 "이게 맞는 타이밍인가"를 더 오래 고민했습니다.
나탈리는 그 기준에서 조용히 비켜섭니다. 그녀는 이혼 후 더 큰 무언가를 성취해서 남편에게 복수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 더 강해졌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 온 일로 돌아갑니다. 그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작품 소개에서도 이 영화를 "상실 이후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저는 그 문장이 소요유와 정확히 겹친다고 느꼈습니다. 잃지 않는다는 것, 그게 소요유의 핵심이라고 읽힙니다.
물론 현실은 마음가짐만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공백, 사회 구조의 불평등은 철학적 통찰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소요유를 "마음을 비우면 다 된다"는 식으로 읽으면 오독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는 개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자신을 재고 있습니까?
나탈리는 그 질문에 말로 답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펼친 책으로, 제자에게 건넨 한 마디로, 그리고 달라진 삶을 살아내는 하루하루로 답합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자벨 위페르가 마지막 장면에서 짓는 표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였습니다. 슬픔도 아니고 해방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어쩌면 그게 변화를 통과한 사람의 진짜 표정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까? 그 이름이 정말 당신 전부를 설명합니까? 《다가오는 것들》은 그 질문을 던지고 조용히 자리를 내어 줍니다.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합니다.
생각해 볼 질문 3가지
- 지금까지 자신을 설명해 왔던 직업이나 사회적 역할이 달라진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자신의 능력과 가치는 무엇일까요?
- 현재의 삶을 성공과 실패라는 기준으로만 평가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지금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일까요?
- 앞으로의 삶에서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과 변화에 따라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각각 무엇일까요?
참고자료
[1] 영화 자료
Palace Films, Things to Come 공식 작품 소개
https://www.palacefilms.com.au/things-to-come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다가오는 것들(Things to Come)》 작품 정보
https://siwff.or.kr/kor/addon/00000002/history_film_view.asp?QueryYear=2016&m_idx=102684
[2] 동양철학 자료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Zhuangzi”
https://plato.stanford.edu/entries/zhuangzi/
참고: https://plato.stanford.edu/entries/zhuangzi/
https://siwff.or.kr/kor/addon/00000002/history_film_view.asp?QueryYear=2016&m_idx=102684
https://namu.wiki/w/%EB%8B%A4%EA%B0%80%EC%98%A4%EB%8A%94%20%EA%B2%83%EB%93%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