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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로 본 아리스토텔레스 (덕의 습관, 중용, 현실 철학)

by cinema-1 2026. 2. 27.

조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주인공은 왜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걸까?' 《위플래쉬》를 보고 난 뒤, 텅 빈 극장을 나서며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꼈습니다. 영화 속 앤드류가 드럼 스틱을 쥐고 피를 흘리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스쳤던 건 2400년 전 한 철학자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복하는 행동이 곧 우리 자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가 바로 이 영화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겁니다.

반복이 만드는 성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에서 덕(arete)이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습관의 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arete란 고대 그리스어로 '탁월함' 또는 '덕'을 의미하는데,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는 상태를 뜻합니다(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쉽게 말해, 용감한 행동을 반복하면 용감한 사람이 되고, 절제하는 선택을 반복하면 절제하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위플래쉬》의 앤드류를 보면서 저는 이 원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재능보다 욕망이 앞섰던 그가, 매일같이 드럼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 말입니다. 제가 평소 영화를 보면서 철학적 의미를 찾으려는 습관이 있는데, 이 영화만큼 철학과 예술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핵심 주장은 명확합니다. 성품은 선택의 누적 결과라는 것이죠. 한 번의 용감한 행동이 용기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로 이를 설명했습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실천만이 진정한 덕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제가 조조 영화를 즐겨 보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습관의 힘'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냥 할인 때문에 시작했던 조조 영화 관람이 이제는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매번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안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으려 하는 것도 어느새 습관이 되었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았던 겁니다. 반복이 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중용의 지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또 다른 핵심 개념은 중용(中庸, mesotes)입니다. 여기서 mesotes란 그리스어로 '중간' 또는 '적절함'을 뜻하는데, 단순한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최적의 균형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용기란 비겁함과 만용 사이의 적절한 지점입니다. 너무 겁이 많으면 비겁하고, 너무 무모하면 만용이 되죠.

중용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이겁니다. 중용은 적당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이 개념을 오해했습니다. '그냥 중간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죠.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전혀 다릅니다.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다이어트한답시고 굶어서 영양 결핍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 적절한 지점을 찾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위플래쉬》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중용의 문제입니다. 플레처 교수의 교육 방식은 명백히 만용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앤드류가 결국 완성해낸 연주를 보면, 그가 찾아낸 건 비겁함과 만용 사이의 어딘가였습니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한계를 돌파하는 그 지점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으로 다시 보는 《위플래쉬》

 

최근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감격의 눈물은 중용의 결과였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경직되지도 않고, 너무 자만해서 방심하지도 않은 채 자신의 최적 상태를 유지했던 것이죠. 실제로 스포츠 심리학에서는 이를 '최적 각성 수준(optimal arousal level)'이라고 부릅니다. 너무 낮으면 집중이 안 되고, 너무 높으면 경직된다는 이론입니다(출처: 대한체육회 스포츠과학연구원).

중용을 실천하기 위한 핵심 요소:

  •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인식
  • 상황에 따른 유연한 판단
  • 꾸준한 반복적 실천을 통한 체화

플라톤과 다른 길, 현실에서 찾는 진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Theory of Forms)을 주장하며 완전한 이상 세계를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관찰을 중시했습니다. 여기서 이데아론이란 플라톤의 핵심 철학으로, 현실 세계는 불완전한 그림자이고 진짜 실재는 이데아라는 완전한 형상의 세계에 있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 플라톤이 동굴 밖의 태양을 이야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동굴 안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분석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철학적 차이가 아니라 삶의 태도 자체가 다른 겁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중세 신 중심 시대를 지배했다면, 지금은 단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영화를 통해 철학을 이해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와 인물을 통해 체험하고 싶었던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 세계에서 진리를 찾으려 했듯이 말이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AI 시대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유효합니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AI를 활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AI에 모든 걸 맡겨 사고를 멈추는 것도 문제지만, AI를 전혀 활용하지 않는 것도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입니다.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습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덕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복적 실천이 필요합니다. 《위플래쉬》의 앤드류가 피 눈물 나는 연습 끝에 완성해낸 그 연주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의 벅차오름, 그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진정한 행복,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입니다.

조조 영화를 보러 가는 습관이 제게 준 건 단순히 영화 감상 그 이상이었습니다. 매번 영화 속에서 의미를 찾고, 철학자들의 사상과 연결하고, 제 삶에 적용해보는 이 모든 과정이 저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저는 제가 반복하는 행동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쌓여 언젠가는 진정으로 '저다운 저'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참고: https://anmoklove.com/entry/%EC%9C%84%ED%94%8C%EB%9E%98%EC%89%AC-%EB%A6%AC%EB%B7%B0-%EC%99%84%EB%B2%BD%EC%A3%BC%EC%9D%98-%EA%B5%90%EC%9C%A1-%EC%8A%A4%EC%8A%B9%EA%B3%BC-%EC%A0%9C%EC%9E%90-%EA%B4%91%EA%B8%B0%EC%9D%98-%EC%97%B0%EC%A3%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