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까지 일해야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할까 《인턴》이 말하는 퇴직 후 행복('왜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불안해할까' 김경일 교수의 강연)
어느 날 문득, 남의 SNS를 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은 적이 있습니다. 화면 속 누군가는 이미 새 직장을 잡았고, 또 누군가는 해외여행 중이었습니다. 제가 느낀 건 부러움이라기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조급함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영화 《인턴(The Intern, 2015)》을 다시 꺼내 든 건 바로 그날 밤이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
누군가의 이력서에는 '70세, 인턴'이라고 적혀 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잘 차려입은 노신사가 노트북 앞에 앉아 짧은 자기소개 영상을 녹화합니다. 이름은 벤 휘터커, 나이는 일흔. 그는 전화번호부 인쇄회사에서 40년을 일하고 은퇴했습니다. 아내도 세상을 떴고, 자녀들은 각자의 삶을 삽니다. 요가도 해봤고, 중국어 강좌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 무언가를 저는 '사회적 연결감'이라고 읽었습니다. 사회적 연결감이란 단순히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 안에서 역할을 갖고 있다는 감각을 뜻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라고도 부릅니다. 인간이 가장 깊은 곳에서 필요로 하는 감각 중 하나입니다.
벤이 시니어 인턴 공고에 지원한 건 돈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장면에서 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화면을 바라보는 눈빛이 긴장하면서도 살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꺼져 있던 스위치가 막 켜지는 것처럼요.
비교는 왜 퇴직 후에 오히려 더 심해질까
직장에 다닐 때는 비교의 구조가 명확합니다. 직급, 연봉, 인사고과. 눈에 보이는 기준이 있으니 불편하지만 적어도 선명합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면 오히려 기준이 사라진 자리에 더 많은 비교가 쏟아집니다.
누구는 재취업했다더라. 누구는 연금이 넉넉하다더라. 누구는 귀농에 성공했다더라. 누구는 자녀가 대기업에 들어갔다더라. 그 이야기들이 하나씩 들어올 때마다 내 삶의 어딘가가 조금씩 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사회 비교 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사회 비교 이론이란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평가할 때 절대적인 기준보다 주변 사람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 판단하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1954년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Leon Festinger)가 처음 체계화한 개념입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Leon Festinger).
문제는 비교 대상이 아무도 완전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늘 타인의 가장 잘 정리된 버전과 나의 가장 뒤죽박죽인 내면을 비교합니다. 이건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은 경기입니다.
영화 속 벤은 직장에서 유일한 고령 인턴입니다. 주변은 전부 젊은 동료들이고, 패션 스타트업의 문화는 그에게 낯섭니다. 충분히 작아질 수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데 그는 위축되지 않습니다. 비교를 멈춘 게 아니라, 비교의 기준을 바꾼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저 친구보다 빠른가'가 아니라 '나는 오늘 여기서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요.
행복은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인가
영화 중반, 벤은 상사인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의 자동차 기사 역할을 맡게 됩니다. 처음엔 분명 어색한 장면입니다. 40년 경력자가 운전기사라니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벤이 핸들을 잡는 자세가 불만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용히 집중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철학적으로 읽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라는 개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역할이 없으며,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간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했을 때, 그 뜻은 당신이 무엇인지는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출처: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벤에게 운전기사 역할은 격하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오늘의 의미입니다.
인지심리학 연구들은 행복의 크기보다 행복의 빈도가 삶의 만족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큰 행복 한 번보다 작은 행복이 자주 찾아오는 삶이 실제로 더 행복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행복의 빈도를 높이기 위해 심리학 연구들이 제안하는 방법들입니다.
- 오늘 나를 잠깐 웃게 한 순간을 하나라도 기억해두기
- 결과가 없어도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 만들기
-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의 사람을 돕는 경험을 작게라도 반복하기
- 오늘 하루를 짧게 글로 남기기
벤이 영화 내내 작은 일에 묵묵히 임하는 모습은 이 목록을 그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순신도 오늘의 날씨를 기록했다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가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떠올리는 이순신은 명량해전의 영웅이지만, 그 일기에는 전투만큼이나 평범한 하루의 기록이 많습니다. 날씨가 흐렸다는 것, 누구를 만났다는 것, 몸이 아프다는 것.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기록된 이 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출처: 국가유산포털, 난중일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제가 요즘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유가 조금 달리 보였습니다. 저는 거창한 것을 기록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무엇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는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장면에서 잠깐 편안해졌는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뒤엉켜 있던 것들이 문장이 되는 순간, 그것들이 조금 작아 보이는 경험을 합니다.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거리를 철학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부릅니다. 메타인지란 자신의 생각을 생각하는 능력, 즉 나 자신을 한 발짝 물러서서 관찰할 수 있는 인식의 층위를 뜻합니다.
영화에서 벤은 젊은 직원들의 갈등을 해결해주거나 조언을 쏟아내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주로 듣습니다. 들으면서 그 자리에 있어줍니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줄스에게 영향을 줍니다. 저는 그 장면이 글쓰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는 행위 자체가 나 자신의 말을 듣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정신건강의 날 행사에서 봉사하고 돌아오던 날, 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갔다가 오히려 뭔가를 받고 돌아온 느낌이었습니다. 젊은 직원들과 함께 행사를 준비하고, 거리를 걸으며 생명존중 메시지를 전하면서, 잠시나마 '퇴직 후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질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놀랍도록 가벼웠습니다.
벤 휘터커가 첫날 출근해서 사무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주변을 살피던 그 장면처럼요.
영화가 끝나고 남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몇 살까지 무언가를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가. 그리고 그 '무언가'가 꼭 직함이어야 할까. 퇴직은 비교의 기준이 무너지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기준을 직접 세울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그 기준을 완전히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질문을 하나씩 기록해가다 보면, 어느 날 그 글들 사이에서 답의 윤곽이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벤이 자기소개 영상을 녹화하던 그날 아침처럼, 어색하지만 살아 있는 눈빛으로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 나는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면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가?
- 최근 한 달 동안 내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즐겁거나 마음이 편안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 퇴직 이후에도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할 수 있는 작은 역할 하나는 무엇일까?
참고 자료
-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진 및 연구분야 소개.
- 통계청, 「2024년 생명표」. 2024년 우리나라 전체 기대수명은 83.7년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 국가유산포털, 「난중일기」. 이순신의 친필 일기와 기록의 역사적·문학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WHO, World Mental Health Day. 세계 정신건강의 날은 매년 10월 10일입니다.
- Apple TV, 《The Intern》 작품 정보. 70세의 벤 휘터커가 시니어 인턴으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A%B9%80%EA%B2%BD%EC%9D%BC(%EC%8B%AC%EB%A6%AC%ED%95%99%EC%9E%90)
https://www.apa.org/monitor/2021/11/festinger-social-comparison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2,00440000,11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