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없어진 날, 다시 찾아간 곳에서 사람을 만났습니다 《리틀 포레스트》 × 장자 × 마르틴 부버
할 일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바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그 순간이 더 낯설고 불안합니다. 저는 어느 아침, 비가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그 질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텃밭에도 갈 수 없고, 특별히 해야 할 일도 떠오르지 않는 날. 귀농은 어렵고 귀촌여건도 안되고 직업을 갖기도 불가능한 지금, 정체성의 혼란 중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다시 떠올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묻는 핵심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속도로 살고 있습니까?"
혜원의 귀향이 도망이 아닌 이유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질문들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주인공 혜원은 도시에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솔직히 저는 "그래서 뭘 얻겠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성과 중심의 삶에 익숙해진 탓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혜원은 고향에서 의외로 할 일이 많습니다. 씨앗을 심고, 불을 지피고, 제철 재료로 음식을 만듭니다. 빠른 결과는 없습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는 동안 그녀는 조금씩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갑니다.
이 지점이 철학적으로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현존재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제시한 개념으로,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살아가는 인간의 방식을 뜻합니다. 혜원이 고향에서 하는 일들은 그 물음의 다른 이름처럼 읽힙니다. 빠르게 완수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싶은지를 천천히 확인하는 시간 말입니다.
20대에 이 영화를 보면 "나도 저렇게 멈추고 싶다"는 감정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60대 이후에 보면 "저 시간이 낭비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세대는 달라도 결국 같은 감정을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장자의 소요유, 그리고 비가 내린 날의 선택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소요유란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노닌다는 뜻으로,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이나 속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리듬으로 존재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출처: 장자, 『莊子』 내편 소요유). 쉽게 말하면 "남들이 뛴다고 해서 나도 반드시 뛰어야 하는 건 아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가 오던 그날 아침, 저는 텃밭에 갈 계획이 통째로 사라지자 잠시 허탈했습니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 하나가 떴습니다. 지난해 농업교육을 담당했던 농감님의 생일이었습니다. 한동안 연락하지 못하고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케이크를 사들고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를 반갑게 맞아주는 얼굴들을 보며 이상한 감정이 차올랐습니다. "아,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구나." 그 감정이 그렇게 묵직하게 느껴질 줄 몰랐습니다.
직장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 매일 부르던 직함
- 출근길의 리듬
- 당연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는 감각
이것들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공허함은, 사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첫 직장을 그만둔 20대도, 30년을 한 곳에 바친 60대도, 그 감각의 결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던 그날 저는 장자가 말한 소요유를 아주 작은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계획이 막혔을 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 성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의 생일이 떠올라서 찾아가는 것. 그 선택이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을 전혀 다른 하루로 바꿔놓았습니다.

나-너의 관계, 직업 이후에야 보이는 것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가 그것입니다. 나-그것이란 상대를 어떤 기능이나 역할로 대하는 관계이고, 나-너란 상대를 역할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 자체로 마주하는 관계를 뜻합니다(출처: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위키백과). 부버는 진정한 만남은 나-너의 방식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 저는 대부분의 사람을 나-그것의 방식으로 만났던 것 같습니다. 담당자로서, 협력사로서, 상사로서. 상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구조 자체가 그런 방식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케이크를 들고 찾아간 그날, 저는 아무런 용건 없이 그냥 그 사람의 생일을 기억했기 때문에 움직였습니다. 처음으로 나-너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찾아간 느낌이었습니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도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야 친구 은숙과 재하를 역할이 아닌 사람 그 자체로 다시 만납니다. 영화가 음식 장면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의 짧은 대화와 침묵에 공을 들이는 것은 그 이유인지 모릅니다.
인생 2막에서 무엇을 먼저 회복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저는 이 나-너의 관계 감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직업이 다시 생기기 전에, 아니 직업이 생기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 자체를 기억받고 기억하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그것이 생기면 하루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텃밭에 못 간 날에도, 할 일이 없다고 느껴지는 아침에도, 움직일 이유가 생깁니다.
《리틀 포레스트》가 묻는 질문은 결국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직업입니까, 아니면 사람입니까?" 저는 아직 그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비가 오는 날에 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했던 그 귀갓길처럼, 정답보다는 그 걸음 자체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금은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도 같은 질문을 남겨두고 싶습니다. 직업이 사라진 자리에서, 혹은 아직 사라지기 전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과 내가 기억하는 장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해볼 질문
- 직업이 사라진 뒤에도 나를 연결해주는 사람과 장소는 무엇인가?
- 나는 사람을 ‘역할’로 만나고 있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만나고 있는가?
- 인생 2막에서 새로운 직장보다 먼저 다시 찾아가고 싶은 사람과 장소는 어디인가?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D%8B%B4_%EB%B6%80%EB%B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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