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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풍요로움은 언제 시작되는가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과 아리스토텔레스, 장자의 소요유

cinema-1 2026. 9. 30. 05:36

명절이 끝나고 저는 도심의 구직자 취업역량교육장을 가기위해 남편이 있는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앞에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퇴직하면 쉬게 될 줄 알았는데, 왜 이 사람들은 더 바쁘게 사는 걸까. 그리고 왜 나는 그 바쁨이 부러우면서도 내 바쁨은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그 질문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광고는 아름다웠고, 현실은 낡아 있었다

노부인 에블린이 자이푸르 공항을 나서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브로셔 속 호텔은 하얀 아치와 푸른 타일로 빛나고 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벽이 허물어지고 전기가 들어왔다 나갔다 했습니다. 존 매든 감독의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1)은 바로 그 순간, 은퇴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정직하게 건드립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됩니다.

영화에는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영국의 은퇴자 일곱 명이 등장합니다. 남편을 잃은 에블린, 젊은 시절의 기억을 되찾으러 온 그레이엄, 부부 사이가 삐걱거리는 더글러스와 진, 건강 문제를 해결하려는 뮤리엘. 이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기대를 품고 인도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편안하게 살고 싶다, 고 말입니다.

그런데 호텔은 기대와 달랐고, 인도는 낯설었고, 서로도 낯설었습니다. 그 낯섦 앞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낡음에 등을 돌리는 사람과, 낡음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으로. 저는 이 갈림길이 은퇴 이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직장을 잃은 사람, 관계가 흔들리는 사람, 삶이 예상과 달라진 모든 사람의 갈림길이기도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었다

그날 저녁 만난 지인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골프를 치는 사람, 수영을 하는 사람, 장구와 사물놀이를 익히는 사람, 기타 발표회를 준비하는 사람. 겉에서 보면 여유롭고 풍요로운 노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풍경 뒤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오랫동안 양가 어머니들을 돌보며 병원과 마트, 은행을 오갔다고 했습니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자기 시간이 생겼고, 이제 바닷가 세컨드하우스에서 쉬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담긴 안도감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며 살아가는 번영의 상태를 뜻합니다. 흔히 '행복'으로 번역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이란 덕(arete)에 따른 활동과 연결된다고 설명합니다. 덕이란 용기, 절제, 정의처럼 인간으로서 탁월하게 기능하는 성품과 능력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퇴직 후 시간이 많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게 조금 버거웠습니다. 저 역시 지금 구직활동을 하고, 귀농 교육을 받고, 봉사활동을 하고, 블로그를 씁니다. 일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쁘다는 사실이 풍요롭다는 느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이 다시 돌아옵니다. 바쁜가가 아니라, 그 활동이 나를 살아 있게 하는가.

장자는 왜 '크게 나는 새'를 이야기했을까

영화 속 에블린은 인도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합니다. 처음엔 어색하고 겁이 났겠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발견합니다. 이 장면이 저는 동양철학의 소요유(逍遙遊)와 겹쳐 보였습니다.

소요유란 장자의 첫 번째 편 제목으로, '걸림 없이 자유롭게 노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IEP)에 따르면 소요유는 사회가 정해놓은 역할과 고정된 가치관의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자유입니다. 익숙한 경계 밖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 그게 장자가 말한 자유의 핵심입니다.

《장자》 첫 장에 등장하는 붕새는 구만 리 높이까지 날아오릅니다. 반면 작은 참새는 이렇게 묻습니다. "저렇게 높이 날아서 뭐 하려고?" 장자는 이 대비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작은 세계의 기준으로는 큰 날갯짓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퇴직 이후의 삶에 이것을 적용하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퇴직했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이 사실은 누가 만든 것인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저 스스로도 퇴직 후 구직자라는 정체성에 너무 꽉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쉬면 안 될 것 같고, 배우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빠르게 다음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습니다. 장자는 그 압박 자체를 한 번 내려놓고 보라고 합니다.

퇴직 후 풍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그렇다면 소요유처럼 자유롭게 살면 그냥 풍요로운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부분을 분명히 짚습니다. 좋은 삶에는 내면의 덕뿐 아니라 외부 조건도 필요하다고. 친구, 건강, 그리고 최소한의 물질적 자원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인간의 능력은 충분히 발휘되기 어렵습니다.

그날 저녁을 돌아보면 이 말이 구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지인이 골프를 칠 수 있었던 것은 돌봄 부담이 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요양보호사라는 제도적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단순히 "마음먹기 달렸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장자의 철학사상 이미지

 

 

 

퇴직 이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생각해보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건강: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즐기기 어렵습니다.
  • 경제적 기반: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해야 선택지가 생깁니다.
  • 돌봄 부담: 가족의 돌봄을 혼자 떠안은 상태에서는 자기 시간이 없습니다.
  • 관계: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이 있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듭니다.
  • 자기 이해: 내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영화 속 에블린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를 받아준 사람이 있었고 건강이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읽힙니다. 조건이 받쳐주었을 때 에우다이모니아가 가능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조건들을 하나씩 마련해가는 중입니다. 완성된 풍요는 아직 아닙니다. 그래도 구직역량 교육을 신청했고, 사람을 만났고, 이 글을 씁니다. 그게 지금 제가 선택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입니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의 은퇴자들은 완벽한 노후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했습니다. 그 영화가 남긴 질문이 지금도 머릿속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 독자 여러분께도 이 질문이 가닿으면 좋겠습니다.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도 된다고,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나에게 ‘풍요로운 삶’은 돈과 시간 중 무엇에 더 가까울까요?

경제적 안정, 여유로운 시간, 건강, 가족관계, 취미, 배움 가운데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직업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떤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봉사활동, 취미, 배움, 지역사회 활동, 가족과의 관계, 창작처럼 직업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 지금 내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조건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하루의 시간 사용, 사람과의 관계, 배움, 취미, 소비, 생활방식 등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작은 영역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John Madden, 《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2011). 여러 영국 은퇴자들이 인도의 낡은 호텔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BFI의 영화 정보와 작품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Claudia Bell, “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 international retirement migration on film,” Ageing & Society. 영화 속 은퇴와 해외이주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경제적 조건과 은퇴 이후 삶의 재구성 문제를 다룹니다.
  •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에우다이모니아를 단순한 감정이나 소유가 아니라 인간의 탁월한 활동과 연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참고했습니다. 또한 좋은 활동을 위해 친구·건강·물질적 자원 같은 외부 조건도 중요하다는 그의 논의를 함께 참고했습니다.
  • Zhuangzi, Zhuangzi. 「소요유(逍遙遊)」와 고정된 사회적 역할과 가치관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장자의 자유 개념을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C%8A%A4%ED%8A%B8_%EC%97%91%EC%A1%B0%ED%8B%B1_%EB%A9%94%EB%A6%AC%EA%B3%A8%EB%93%9C_%ED%98%B8%ED%85%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ethics/
https://iep.utm.edu/zhuangz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