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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박람회에서는 늦었다고 했지만, 배움에는 늦은 나이가 없었다 《오마주》와 아렌트·보부아르·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다시 시작하는 삶

cinema-1 2026. 10. 8. 05:01

어느 날 오전에는 새 기술을 배우며 설레고, 오후에는 취업박람회에서 조용히 낙담했습니다. 같은 날, 같은 몸으로 겪은 두 가지 감정이었습니다. 그 간극 속에서 신수원 감독의 영화 《오마주》가 불쑥 떠올랐습니다. 지완이라는 중년 여성 감독이 낡은 필름 앞에서 다시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처럼, 저도 그날 무언가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취업박람회와 영상 실습 사이에서, 하루에 두 개의 나를 만났습니다

그날 아침은 지역 축제 현장에서 시작됐습니다. 자원봉사센터 유튜브 크리에이터 과정의 첫 실습이 있었습니다. 강사님이 알려준 대본을 들고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는데, 막상 해보니 인터뷰 하나가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습니다. 결국 대본을 살짝 벗어나 제 방식대로 찍었고, 편집을 마치고 나서는 아쉬운 장면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도 단체방에 영상을 올리고 나니 묘하게 뿌듯했습니다. '처음 해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요.

오후에는 시내 취업박람회를 둘러봤습니다. 청년 대상 부스마다 사람이 북적였고, 60세 이상 취업알선 기관 부스는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취업상담사들을 반가운 마음으로 만났지만, 돌아오는 길은 어쩐지 무거웠습니다. 오전에는 '조금만 더 연습해보자'고 생각했는데, 오후에는 '이제 늦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 두 감정의 차이가 신기했습니다. 취업시장에서 저는 '나이가 많은 구직자'였고, 영상 실습에서 저는 그냥 '처음 배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하루인데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그게 오히려 하나의 단서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영화 《오마주》의 지완은 흥행 실패가 이어진 중년 감독입니다. 그는 생계를 위해 1960년대 한국 여성 감독 홍은원의 작품 《여판사》 필름 복원 작업을 맡습니다. 처음엔 부업에 가까웠던 그 일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사라진 필름을 찾아 발로 뛰고, 오래된 사람들을 만나고, 과거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지완은 자신 안에 남아 있던 무언가를 건드립니다. 세상이 먼저 기회를 준 것도 아니고, 갑자기 젊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손을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저는 그 장면이 오전의 제 영상 실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형편없는 결과물이라도, 일단 만들어냈다는 사실. 그것이 아직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습니다.

철학자 세 명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시작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고

 

영화<오마주>와 아렌트 보부아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이미지

 

 

 

한나 아렌트는 탄생성(natality)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탄생성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언제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생물학적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렌트는 이 개념을 인간의 행위(action)와 연결지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무언가를 시작하는 행위 자체가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날 오전에 처음 인터뷰를 해보고, 처음 편집하고, 처음 결과물을 단체방에 올렸습니다. 취업시장에서는 '늦은 사람'이었지만, 그 실습 현장에서는 분명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렌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저는 그 순간 탄생성을 살고 있었던 셈입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년』에서 다른 각도로 같은 문제를 건드립니다. 보부아르에게 노년이란 단순히 몸이 쇠퇴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은 과거로만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향해 자신을 기획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을 그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체력의 차이, 고용시장의 구조, 경제적 조건. 그 모든 것이 실재합니다. 하지만 제약이 존재한다는 것과 가능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는 개념으로 행복을 설명했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히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실제 활동 속에서 발휘하며 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즉, 행복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상태'보다 '활동하는 과정' 자체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가지 관점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됩니다.

  • 아렌트의 탄생성: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은 나이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
  • 보부아르의 기획: 인간은 과거보다 앞으로의 나를 향해 자신을 열어두는 존재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 좋은 삶은 능력을 활동으로 실현하는 그 과정에 있다

취업박람회에서 원하는 자리를 찾지 못한 오후와, 서툴게 영상을 하나 만들어낸 오전. 후자가 이력서에는 적히지 않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으로는 그것이 오히려 더 '살아있는 활동'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솔직히 그 생각이 처음엔 위로처럼 느껴졌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꽤 정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완이 필름의 사라진 부분을 찾아 발로 뛰듯, 저도 아직 찾는 중인 무언가가 있습니다. 지역 축제를 기록할 수도 있고, 귀농 생활을 영상으로 남길 수도 있고, 지금처럼 영화와 철학 이야기를 글로 쓸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될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큼은, 오늘도 확인했습니다.

영화 《오마주》를 보고 나면 지완에게 '잘 됐다'는 말보다 '계속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계속했다'는 말이 지금의 저에게도,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가장 현실적인 위로가 아닐까 합니다. 취업에는 늦은 기회가 분명 있지만, 삶 전체가 늦어버리는 건 아닐 테니까요. 당신에게는 지금 손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1. 나는 ‘나이가 많아서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너무 일찍 포기한 일이 있는가?
  2. 취업과 상관없이 지금 내가 새롭게 배우고 싶은 기술이나 활동은 무엇인가?
  3. 지금까지의 경력과 경험을 활용해 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무엇일까?

참고 자료

  • 한국영상자료원, 「오마주」 — 신수원 감독, 2021년 제작, 108분, 중년 영화감독 지완과 홍은원 감독의 필름 복원 작업에 관한 공식 작품 정보.
  • 씨네21, 「오마주」 — 작품 정보와 개봉일, 줄거리 및 제작 정보. 영화는 2021년 제작되어 2022년 5월 26일 개봉했습니다.
  • 연합뉴스, 「'오마주' 신수원 감독…」 — 신수원 감독이 잊힌 여성 영화인과 자신의 영화 만들기 경험을 연결해 설명한 인터뷰.
  • 씨네21, 신수원 감독·이정은 배우 인터뷰 — 영화 속 지완의 필름 복원 작업과 직업정신에 관한 설명.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 아렌트의 탄생성(natality), 새로운 시작과 행위(action)에 관한 설명.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와 인간의 행복을 활동(activity)과 탁월성(virtue/excellence)의 관점에서 설명.

참고: https://namu.wiki/w/%EC%98%A4%EB%A7%88%EC%A3%BC(%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