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왜 시대 앞에서 괴로워하는가─ 《동주》 × 장폴 사르트르
《동주》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 영화가 이렇게 오래 마음에 남을 줄 몰랐습니다. 독립운동 영화라는 말에 어떤 뜨거움을 기대했는데, 막상 스크린 앞에 앉으니 영화는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만 말했습니다. 흑백의 화면 속 청년은 총을 들지도, 군중을 이끌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되묻고 또 되물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저는 묘하게 멈칫했습니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침묵이 던지는 철학적 물음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건 단순한 서사가 아니었습니다. 윤동주라는 인물이 가장 자주 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자기 응시입니다. 그는 사촌 송몽규가 직접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동안, 혼자 방 안에서 시를 씁니다. 그리고 그 행위 자체를 부끄러워합니다. "시를 쓰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놓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것이 나약함의 묘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은 미장센(mise-en-scène)이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공간, 인물의 위치가 서사 의미를 함께 구성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윤동주가 홀로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구도, 그 위로 드리운 빛과 그림자의 대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내면의 분열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왜 괴로운가. 영화는 그 답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윤동주가 쓴 시 한 줄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 시에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독이 담겨 있습니다. 억압된 시대가 만든 고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의식이 만든 고독이기도 합니다.
동양 철학의 시선: 유교의 신독과 부끄러움의 윤리학
동양 철학, 특히 유교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전혀 다른 결이 드러납니다. 제 해석으로는, 윤동주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은 유교 윤리학의 핵심 개념인 신독(愼獨)과 깊이 닿아 있습니다. 신독이란 '혼자 있을 때도 삼간다'는 뜻으로, 남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엄격하게 살피는 도덕적 태도를 말합니다.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서 강조된 이 개념은 외부의 규율이 아니라 스스로의 양심이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유입니다.
윤동주가 방 안에서 홀로 시를 쓰고, 그 시를 쓰면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바로 신독의 형상화처럼 보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를 감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비하가 아니라, 인간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도덕적 행위입니다.
유교 전통에서 부끄러움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맹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부끄러움과 부정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동주는 가장 유교적인 의미에서, 가장 도덕적 감수성이 살아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침묵과 괴로움은 무기력이 아니라 양심의 언어였습니다.
동시에 도교의 시선도 이 영화 속에 조용히 녹아 있습니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 즉 억지스러운 개입 없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태도는 윤동주가 시를 쓰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남깁니다. 이것이야말로 거대한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무위의 실천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양 철학의 시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와 자유의 무게
여기에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를 겹쳐놓으면, 윤동주의 고뇌는 훨씬 더 넓은 인간 보편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이후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사상입니다. 신이 인간에게 정해진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스스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선택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 문장이 처음에는 역설처럼 들립니다. 왜 자유가 선물이 아니라 선고인가. 그것은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답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 불안 속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사르트르는 이 불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을 자기기만(mauvaise foi), 즉 '나쁜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윤동주의 괴로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적입니다. 그는 자기기만을 거부합니다. 시대가 강요하는 침묵에 그냥 녹아들거나, "나는 시인일 뿐이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끊임없이 "이 선택은 옳은가, 나는 충분히 살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이 물음 자체가 실존주의적 자유의 실천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시선을 나란히 놓으면, 두 사상이 결국 같은 인간을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유교의 신독: 혼자 있을 때도 양심 앞에 서는 것, 부끄러움을 도덕적 감수성으로 삼는 것
- 도교의 무위: 억지로 영웅이 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언어로 존재를 드러내는 것
-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선택을 피하지 않고, 그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하는 것
세 관점 모두 윤동주를 나약한 인물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인물로 읽어냅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동주》는 2016년 개봉 당시 독립 흑백 영화라는 형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115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지표가 아닙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윤동주의 괴로움에서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증거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며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선택의 폭이 좁았던 시절, 혼나지 않을 만큼만 결정하고 그것을 자유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던 시간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도 어쩌면 하나의 실존 방식이었을 겁니다. 최소한의 선택이라도 스스로 했다면,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만들어간 것이니까요.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취업의 압박, 비교의 소용돌이, SNS가 만들어내는 끝없는 자기 검열 속에서 그들은 날마다 묻습니다.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가." 그 질문이 윤동주의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시대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만듭니다.
어쩌면 인간의 존엄은 시대를 바꾸는 거대한 행동보다, 매 순간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묻는 그 조용한 태도 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윤동주가 끝내 시를 버리지 않았듯이, 그 물음을 버리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8F%99%EC%A3%BC(%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sartre/
https://www.kob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