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들이 모이면 왜 괴물이 될까?" : 영화 <미스트>와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 비도덕적 사회
평소 다정하고 예의 바른 직장 동료가 업무 중 어느 순간 서늘할 정도로 권위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직업상담사로 일하며 상담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인사 담당자들에게서 이런 기묘한 이중성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땐 누구보다 따뜻하고 상식적인 분들이, '조직의 논리'라는 방패 뒤에 서면 나이나 경력을 잣대로 냉정하게 사람을 거르는 '비정한 칼'이 되더군요.
하지만 정작 저를 가장 괴롭게 했던 건 제 안의 모습이었습니다. 평소 온화하던 동료가 민원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일 때, 저 역시 그 부당함을 알면서도 조직의 평화를 해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침묵하며 동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비겁했던 제 뒷모습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했습니다. 왜 선량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이토록 쉽고 비도덕적으로 변하는 걸까요?
오늘은 짙은 안개 속에 갇힌 인간들의 광기를 그린 영화 <미스트(The Mist)>와 현대 기독교 리얼리즘 철학의 거장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통찰을 빌려 이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니부어가 그의 저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경고했던 '집단 이기주의'의 실체가 우리 일상과 일터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그 서늘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안개 속 마트, 평범한 이웃은 어떻게 광신도가 되었나
영화 <미스트>를 보신 분이라면 기억하실 겁니다. 갑작스러운 안개와 괴생명체 때문에 대형 마트에 갇힌 사람들은 처음엔 서로를 도왔습니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식량을 나눴죠. 하지만 공포가 길어지자 분위기는 급변했습니다. 평소 다정했던 이웃집 아줌마가 "누군가를 제물로 바쳐야 우리가 산다"며 돌을 던지는 광신도로 변한 겁니다.
이 장면에서 떠오른 개념이 바로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입니다. 집단 극화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면 처음보다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흐르는 현상을 뜻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마트 안 사람들도 처음엔 "괴물을 피해야 한다"는 온건한 합의였지만, 공포가 증폭되자 "희생양을 찾아야 한다"는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제가 목격한 축구장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평소 차분하게 일하던 직장 동료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패배하자 난동을 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개인으로서는 이성적이던 사람이 집단 속에서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였죠. 니부어는 이를 정확히 예견했습니다. 개인은 동정심과 양심을 가질 수 있지만, 집단으로 뭉치면 이기심은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고 도덕적 통제는 마비된다고 말입니다.
니부어가 폭로한 집단 이기주의, 양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이상주의자들의 믿음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개개인이 착해지면 세상도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집단은 개인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집단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집단의 이익을 '정의'로 포장하는 데 능숙합니다. 영화 속 마트 사람들도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 울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수를 배척하며 공포를 정당화했습니다.
니부어는 더 나아가 강제력(Coercion)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강제력이란 법과 제도 같은 사회적 장치를 통해 집단의 이기심을 통제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순수한 설득이나 양심 호소만으로는 집단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니부어의 주장입니다(출처: 한국기독교윤리학회). 영화의 주인공 데이비드가 끝까지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물리적 충돌과 비극을 피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재취업을 준비하며 이 '집단의 비도덕성'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난 인사 담당자들은 제 도전을 응원했지만, 그들이 속한 시스템은 차가웠습니다. 45개의 정성스러운 글을 썼음에도 '가치 없는 콘텐츠'라는 기계적인 거절 메일을 받았고, 나이 제한이 없다면서도 경력 단절을 이유로 서류 탈락했습니다. 시스템은 개인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오직 집단의 효율성과 생존만을 위해 움직이죠.
니부어의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제가 겪는 좌절이 제 무능 때문이 아니라 집단이 가진 구조적 이기심 때문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부당한 시스템에 목소리를 낼 '정치적 근육'을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과 미스트 사람들의 공통점
니부어가 경고한 '비도덕적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실례는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실무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입니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없었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성실한 관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치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의 부속품이 되었을 때, 수백만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실어 나르는 열차 배분 업무를 오직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수행했습니다.
재판장에서 아이히만은 "나는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며, 내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평범한 사람이 사악한 체제 속에서 사유를 멈추고 명령에 복종하며 저지르는 악행을 뜻합니다(출처: 한국철학회).
영화 <미스트>의 마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집에서는 다정한 부모이자 성실한 이웃이었지만, '생존'이라는 집단적 목표와 '광신적 선동'이라는 시스템 속에 편입되는 순간 무고한 이웃을 괴물에게 던져줄 제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평소 잘 알고 있던 동료가 조직의 체면을 위해 민원인들에게 권위적으로 대할 때, 저는 양심적으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했습니다. 직장의 체면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막을 수 없었죠. 그 순간 저도 집단의 논리에 함몰된 '평범한 악'의 일부였던 겁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집단 대 집단의 갈등입니다. 최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미국과 이란의 갈등까지 더해지며 끝없는 인명 살상과 시설 파괴로 많은 나라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오직 명령이라는 이유로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양심만으로 충분할까요? 저는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양심은 중요하지만, 때로는 강력한 법과 제도 같은 '강제력'이 더 중요한 시점이라고 봅니다. 국제사회가 정의를 외쳐야 하며, 집단의 광기를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다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만약 제가 영화 <미스트>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다수의 생존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광장에 설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인간의 존엄을 외치는 고립된 소수로 남을 것인지 정말 많은 고민이 됩니다. 그래서 더욱 니부어의 통찰이 필요합니다. 집단이 가진 이기심의 본질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그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니부어는 우리에게 낭만적인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착한 개인들이 모여도 집단은 쉽게 괴물이 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집단의 안개 속에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목소리를 낼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 모두는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