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변할까─ 영화 《26년》으로 보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영화 26년이 지금도 강한 울림을 주는 이유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원한(ressentiment)의 의미
상처가 오래 지속될 때 인간은 어떻게 변하는가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가 남기는 감정
기억과 복수 사이에서 인간은 왜 흔들리는가
5.18 민주화 운동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어서인지 수많은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솔직히 저는 영화 《26년》을 처음 봤을 때 폭력 장면이 가장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끝까지 보고 나니 더 무거운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날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 그 간극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감정의 뿌리를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으로 들여다본 기록입니다.
정의가 지연된 사회, 남겨진 원한의 구조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벌어진 민주화 항쟁으로, 공식 사망자만 166명, 행방불명자 54명으로 집계됩니다(출처: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하지만 이 숫자 너머에 있는 것, 즉 살아남은 사람들이 이후 40년 넘게 안고 살아야 했던 감정의 무게는 어떤 수치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 감정을 레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레상티망이란 직접 반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눌린 분노와 억울함이 내면에 오랫동안 축적되는 심리 상태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당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굳어버린 감정입니다.
영화 《26년》의 인물들이 정확히 그 상태입니다. 삶은 흘러갔지만 내면은 1980년 5월에 멈춰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집착이 아닙니다.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을 때 인간의 심리가 보이는 구조적인 반응입니다.
원한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로 번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 집단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입니다. 집단 트라우마란 특정 공동체가 공유한 충격적 사건이 그 집단 전체의 심리와 행동 방식에 장기적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합니다. 개인 트라우마와 달리 세대를 넘어 전해지고, 사회 분위기 자체를 냉소적으로 바꿔놓는 힘이 있습니다.
연일 반복되는 진상규명 요구와 그때마다 다시 불거지는 논란을 보면, 이 집단 트라우마가 아직 치유 단계에 진입조차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처가 왜 사라지지 않는가, 니체의 기억론으로 본 핵심 분석
제가 재취업을 준비하던 시절, 면접을 몇 번 거치고 나서 생긴 습관이 하나 있었습니다. 결과 문자가 오기 전부터 스스로 기대를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때문에 어차피 안 되겠지"라는 말을 스스로 먼저 꺼내면서요. 그때는 그게 자기 보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건 레상티망이 체념으로 굳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니체는 인간이 기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고 봤습니다. 문제는 그 기억이 해소되지 않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 때입니다. 이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개념으로 다룹니다. PTSD란 충격적 사건 이후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습하여 일상 기능을 방해하는 정신건강 상태를 의미하며, 개인뿐 아니라 역사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집단에게도 유사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국가인권위원회는 5.18 관련 트라우마 연구를 통해 생존자와 유가족의 상당수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얼마전에 있었던 스타벅스 코리아의 마케팅 논란을 저는 그 맥락에서 이해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왜 그토록 강한 반응이 일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달리 읽힙니다. 오랫동안 억눌러 온 감정이 아주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레상티망의 작동 방식입니다.
상처가 다시 터지는 순간의 공통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진상규명이 완결되지 않아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있을 때
- 가해자 혹은 구조에 대한 공식적 책임이 불분명하거나 부재할 때
- 외부의 무감각한 언급이나 행동이 오래된 기억을 건드릴 때
- 피해자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속될 때
이 조건들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옵니다. 자녀의 학력이나 학벌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나이를 이유로 한 채용 거절처럼 일상의 작은 부당함도 같은 구조로 작동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이 메커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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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용서 사이에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인간은 이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니체는 단순한 복수나 망각 둘 다 해답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는 허무주의(nihilism)적 체념, 즉 "어차피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냉소에 빠지는 것을 가장 위험한 상태로 경고했습니다. 허무주의란 모든 가치와 의미가 무너진 상태로, 분노조차 사라진 자리에 무감각만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도 재취업 과정이나 자녀 문제 앞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무작정 찾아온 자녀가 처음엔 열심히 할 것처럼 굴다가 결국 부모 탓을 할 때의 그 감정,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냥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만도 오래 걸렸습니다.
영화 《26년》이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영화는 복수를 통해 속이 시원해지는 결말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감정을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는 최선은 완벽한 해결을 기다리며 원망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할 것은 기억하되, 그 기억을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26년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것 자체가, 그리고 지금도 5.18을 기억하는 글이 쓰이는 것 자체가, 그 방향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정의가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침묵하지 않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 생각해볼 질문
정의가 끝내 실현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변할까?
기억은 인간을 지키는 힘일까, 붙잡아 두는 감정일까?
나는 타인의 상처를 너무 쉽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참고: https://namu.wiki/w/5.18%20%EB%AF%BC%EC%A3%BC%ED%99%94%EC%9A%B4%EB%8F%99
https://www.518archives.go.kr
https://www.humanright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