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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집과 땅이 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리틀 포레스트》 × 장자 — 남의 좋은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서

cinema-1 2026. 8. 18. 05:15

혜원이 처음 고향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짐 가방 하나를 끌고, 아무 말 없이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짓는 그 장면. 저는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시험에 떨어지고, 연애도 꼬이고, 서울이 버거워진 사람이 결국 돌아온 자리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 영화가 귀농을 권유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 저만 그렇게 읽은 게 아닐 거라 믿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해보려 합니다.

밭을 갈면서 혜원이 찾은 것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2018)에는 사건이 거의 없습니다. 혜원은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음식을 만들고, 친구와 밥을 먹습니다. 봄이 오면 봄 음식을 만들고, 겨울이 오면 겨울 음식을 만듭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반복이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습니다. 화면을 보는 내내 '이게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데, 저는 그게 혜원이 무언가를 '성취'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실존적 체험(existential experience)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적 체험이란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준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방식의 삶을 말합니다. 혜원이 밭에서 찾은 것은 단순히 흙이 아니라,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자기 감각이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귀농인의 집 텃밭에서 잡초를 뽑을 때 느끼는 감각과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그 땅은 제 땅이 아닙니다. 지자체에서 빌려주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꽃이 피는 걸 보고 있을 때, 땅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는 솔직히 별로 생각나지 않습니다.

장자는 왜 '남의 기준'이 위험하다고 했을까

광복절 연휴가 끝나기 전 40년 지기 친구 부부의 텃밭을 구경했습니다.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기관에서 일하다 퇴직한 친구 남편이 도심 근처 택지를 마련해 다양한 작물을 기르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곳에 전원주택을 지을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저 땅이 내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때 장자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장자(莊子)는 기원전 4세기 중국 도가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그의 사유에서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란 어떤 외부의 기준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노니는 상태를 뜻합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남들이 좋다는 것을 나도 반드시 좋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스탠퍼드 철학백과(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는 장자 철학의 핵심 특징으로 사회적 규범과 고정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내적 자유(inner freedom)를 설명합니다. 이 내적 자유란 세상 밖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나를 통째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능력입니다.

저는 친구 부부의 땅을 부러워하는 마음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 부러움이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가 되는 순간, 제 삶의 주도권이 제 손에서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혜원의 친구 은숙은 결국 도시로 떠납니다. 재하는 고향에 남습니다. 영화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맞는 방식이 있다는 것, 그 차이를 존중하는 것, 그게 장자가 말한 자유에 가장 가까운 태도일 수 있습니다.

소유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저런 곳에서 살면 정말 좋겠다." 남편의 대답은 짧았습니다. "나는 농사일 별로 관심 없어." 순간 속이 상했습니다. 제가 오래 꿈꾸어온 삶을 가장 가까운 사람이 함께 그려주지 않는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배우자도 나와 같은 꿈을 가져야 하는 걸까요. 장자의 말을 빌리면, 세상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 자체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맞는 것이 상대에게도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생각이 이어지면서 질문이 하나 달라졌습니다.

원래 제가 품고 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 저 땅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을까?
  • 어떤 조건이 되면 전원주택을 지을 수 있을까?
  • 왜 남편은 내 꿈을 이해하지 못할까?

그런데 지금 제가 더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 나는 지금 내가 가진 텃밭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 소유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충분히 느끼고 있는가?
  • 내 삶의 기준이 나에게서 출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보고 생겨난 것인가?

 

영화 <리틀포레스트>와 장자의 철학사상 이미지

 

 

한국영상자료원은 《리틀 포레스트》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이야기"로 소개합니다. 잠시 멈춘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혜원이 고향에서 한 일은 삶을 바꾼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방향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맥락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먼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그 의미는 타인이 건네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이 계절에,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서 비로소 생겨납니다.

저는 지금 귀농귀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큰아이 결혼도 시켰고, 작은아이도 어느 정도 독립했고, 직장도 그만뒀습니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흐려진 이 시간이 어떤 날은 자유처럼, 어떤 날은 텅 빈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아마 20대 청년도, 50대 중년도, 60대 은퇴자도 각자 다른 이유로 그 빈 공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혜원도 그 빈 공간 앞에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찾은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어쩌면 삶에서 가장 값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도 지금 이런 질문 하나쯤 있으십니까. '나는 정말 어떤 삶을 원하는가?' 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질문만큼은 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친구의 ‘집과 땅’일까, 아니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일까?
  • 배우자가 나와 같은 꿈을 꾸지 않아도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조금씩 만들어갈 수 있을까?
  • 소유하지 못해서 불행한 것과, 이미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해서 불행한 것은 어떻게 다를까?

참고: https://namu.wiki/w/%EB%A6%AC%ED%8B%80%20%ED%8F%AC%EB%A0%88%EC%8A%A4%ED%8A%B8(%ED%95%9C%EA%B5%AD%20%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zhuangzi/
https://www.kmd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