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지키면서도 먹고살 수 있을까 《허니랜드》 × 한스 요나스 — 인간과 자연 사이의 책임
"반은 나를 위해, 반은 벌을 위해."
이 짧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 여자가 벌집 앞에서 중얼거리듯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이 유독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제가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배추 모종 하나가 품고 있던 질문
실업급여 신청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여름, 저는 작은 텃밭에 배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친구 남편이 건네준 모종 몇 포기였습니다. 밭을 고르고 비닐을 씌우고 조심스럽게 심었는데, 며칠 만에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면서 잎이 힘없이 늘어졌습니다.
물을 주며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 TV를 켜니 아랫지방에 폭우가 계속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짧은 시간에 엄청난 비가 내려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두 장면이 겹쳤습니다. 더위에 시드는 제 모종과, 폭우에 잠긴 누군가의 밭. 제가 걱정하는 것이 갑자기 너무 작고,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녁무렵 이웃 분이 저의 텃밭에 오셔서 자신의 텃밭에는 농약을 쳐서 고추와 방울토마토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마음 한켠이 복잡했습니다. 농약을 안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병충해가 오면 작물이 망가지고, 작물이 망가지면 그게 생활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허니랜드》가 떠올랐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이 영화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명확한 악인이 없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이웃 가족도, 하티제도, 모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아주 천천히, 거의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한스 요나스가 묻는 것, 그리고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
이 지점에서 저는 독일계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를 떠올립니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Prinzip Verantwortu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책임의 원칙이란, 현대 기술문명이 가진 힘이 너무 커져서 우리의 행동이 지금 당장뿐 아니라 먼 미래와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새로운 도덕적 의무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질문입니다. "내가 지금 편리하게 얻는 것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출처: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1979)
요나스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예방의 태도였습니다. 결과가 불확실할수록, 그리고 그 결과가 돌이키기 어려울수록,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약 문제로 돌아오면, 지금 당장 병충해를 막는 것은 필요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장기적으로 토양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번이라도 물어보는 것, 요나스는 바로 그 질문을 멈추지 말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개념이 있습니다.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입니다. 생태중심주의란 인간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보는 입장을 말합니다. 인간 중심으로만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도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시각입니다. 하티제의 원칙은 어쩌면 이 생태중심주의를 철학 책 없이 몸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읽힙니다.(출처: Aldo Leopold, 『모래 군의 열두 달』, 1949)
그런데 여기서 솔직히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에 요나스의 말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먹고살기도 빠듯한 사람에게 미래 세대를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공평한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의문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균형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하여
《허니랜드》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장면은 하티제가 혼자 벌집을 바라보는 장면이었습니다. 설명도 없고 배경음악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티제의 양봉 방식에는 텔로스(Telos)라는 개념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텔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개념으로,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맞는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티제에게 벌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관계가 무너졌을 때 벌도, 하티제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저는 텃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이 풀도 살려고 자라는 건데, 뽑아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두면 배추가 자라지 못합니다. 결국 저도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균형이라는 말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매번 실제로 손을 더럽히며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작은 기준들을 스스로 세워보기로 했습니다.
-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지 확인한다.
- 작물의 상태를 꾸준히 관찰하며, 꼭 필요한 경우에만 개입한다.
- 음식과 자재는 필요한 만큼만 사고, 남기지 않는다.
- 이웃 농부의 선택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사정을 먼저 생각한다.
- 기후변화 관련 뉴스를 마냥 남의 일로 흘려듣지 않는다.

거창한 실천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은 기준들이 없으면, 저는 매번 편한 선택만 하게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티제의 "반은 나를 위해, 반은 벌을 위해"는 단순한 양봉 규칙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이 일종의 삶의 태도라고 읽힙니다. 내가 필요한 만큼은 가져가되, 다른 존재가 살아갈 몫까지 다 가져가지는 않겠다는 태도. 어쩌면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원칙이 그것일지도 모릅니다.
텃밭에서 시들어가던 배추 모종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모종 하나가 제게 던진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자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라는 질문은 텃밭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에어컨 온도를 조절할 때도, 뉴스를 볼 때도 조용히 따라옵니다. 독자분들께도 오늘 어느 순간에 그 질문이 잠깐이라도 머물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결론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한 번 더 묻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에서 생각해볼 작은 실천
- 농약이나 제초제를 사용하기 전에 정말 필요한지 먼저 확인하기
- 가능한 경우 물리적 제초나 친환경적 방제 방법을 먼저 알아보기
- 텃밭에서 생태계의 변화와 곤충을 관찰해보기
- 음식과 물건을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기
- 기후변화와 지역 환경 문제에 관심 갖기
- 환경을 이야기할 때 농민의 생계와 현실도 함께 생각하기
생각해볼 질문 3가지
-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의 편의를 어디까지 포기해야 할까?
- 생계를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것과 자연을 과도하게 이용하는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
- 내가 오늘 선택한 편리함은 미래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남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