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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내 자리를 찾는 일일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와 하이데거·아렌트·헤겔의 노동 철학

cinema-1 2026. 10. 7. 05:44

일자리를 찾는다는 게 정말 '내 자리'를 찾는 일과 같을까요? 고용24 화면을 켜서 수백 개의 채용공고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자리는 이렇게 많은데, 왜 저는 이 화면 앞에서 이렇게 막막한 걸까요. 이태겸 감독의 독립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1)는 바로 그 막막함의 정체를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건드립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영화가 남긴 질문을 다시 꺼내보려 합니다.

파견된 자리에서, 사람은 무엇을 먼저 찾는가

영화 속 정은은 7년을 다닌 회사에서 어느 날 하청업체로 파견됩니다. 본인이 원한 게 아닙니다. 낯선 현장,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정은이 제일 먼저 찾는 건 더 좋은 월급이 아닙니다. '내가 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솔직히 처음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지인과 관광버스를 타고 지역 한방축제에 갔다가 낯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앉아 밥을 먹던 날, 그 장면이 갑자기 되살아났습니다. 저 역시 거기서 '직원'이 아니었고, '주민'도 아니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그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 잠깐이나마 제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여기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개념을 하나 빌려오면 좋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고 불렀습니다. 세계-내-존재란, 인간이 세상과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맥락과 관계와 장소 안에 이미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 혼자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도구를 쓰고, 어딘가를 오가는 구체적인 삶 속의 내가 진짜 인간이라는 이야기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그러니까 정은이 낯선 현장에서 불안한 건, 월급이 줄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귀농인의 집 계약 만료를 앞두고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집을 떠나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만든 계절과 관계와 기억을 두고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이데거의 말로 하면, 거주(dwelling)를 잃는 일이었습니다. 거주란 단순히 지붕이 있는 곳을 갖는 게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 자신의 삶을 뿌리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와 하이데거 아렌트 헤겔의 철학사상 이미지

 

 

일자리가 있어도 '살아 있는 느낌'이 없을 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 노동(labor): 먹고 살기 위해 반복하는 활동. 소비되고 사라집니다.
  • 작업(work): 인간이 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활동. 결과물이 남습니다.
  • 행위(action):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적 세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

이 구분이 왜 중요하냐면요. 우리가 '일자리를 찾는다'고 할 때 대부분은 노동의 조건, 즉 월급·근무시간·계약 여부를 먼저 봅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렌트의 눈으로 보면, 일자리가 있다는 것과 의미 있는 활동을 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저는 생명지킴이 서포터즈로 봉사활동을 하던 날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급여도 없었고 직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 충만했습니다. 아렌트라면 그걸 행위의 감각이라고 불렀을 것 같습니다. 행위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세상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정은도 영화에서 비슷한 갈림길에 섭니다. 일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느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진짜 '일하는 삶'인 걸까요. 고용24에 가득 찬 채용공고를 보면서 제가 막막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자리의 수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 안에서 제가 어떤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지가 문제였던 겁니다.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말이 남긴 것

영화 제목이 독특합니다. 회사는 사람을 해고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경력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그냥 조직의 결정으로 내가 있던 자리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말합니다. 그래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고.

이 문장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조금 울컥했습니다. 아들이 직장에 적응해가는 걸 보면서 마음을 졸이다 추석이 지난 뒤 지방으로 내려오던 시간, 저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한동안 잘 몰랐습니다.

여기서 헤겔의 개념이 하나 더 들어옵니다. 헤겔은 자기의식이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인정(mutual recognition)을 통해 자신이 하나의 독립된 주체임을 확인한다는 겁니다. 상호인정이란 내가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도 나를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가 성립한다는 뜻입니다. 퇴직 이후의 공허함이 단순히 시간이 많아서가 아닌 경우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필요로 하던 사회적 관계가 갑자기 끊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역축제에서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과 버스에 앉아 밥을 먹었던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실했습니다. 저는 그 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잠깐이나마 그들과 같은 움직임 안에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인정의 경험이었지만, 그게 마을이라는 게 지리가 아니라 관계로 만들어진다는 걸 몸으로 알게 해줬습니다.

자리가 사라진 것과 가치가 사라진 것은 다른 일입니다. 지원서가 거절됐다고 제 경험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정은이 낯선 파견지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어쩌면 그 태도 하나를 연습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 가지가 조금 분명해졌습니다. 저는 빈자리를 채울 직업을 찾는 게 아니라, 제 삶과 연결되는 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회사 안에 있을 수도 있고, 동네 봉사활동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찾고 있는 게 일자리입니까, 아니면 내 자리입니까. 그 두 질문이 같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 사이 어딘가에 진짜 구직의 시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1. 나는 지금 ‘아무 일자리’가 아니라 어떤 조건과 의미를 가진 ‘내 자리’를 찾고 있는가?
  2. 직업을 제외하고도 내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3.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자리를 되찾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삶의 자리를 만드는 것일까?

 

참고 자료

  • 씨네21,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작품 정보 — 2020년 영화, 2021년 1월 28일 개봉, 정은의 파견과 ‘자리를 찾는’ 과정에 대한 시놉시스.
  • TVING,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작품 정보 — 이태겸 감독, 유다인·오정세 출연 및 영화의 공식 줄거리.
  • 씨네21, 오정세 인터뷰 — 영화에서 정은의 ‘자리를 찾는’ 과정과 인물 관계에 대한 설명.
  • 영화진흥위원회, 「202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개봉일을 2021년 1월 28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rtin Heidegger” 및 “Heidegger and the Other Beginning” — 세계-내-존재, 장소, 거주(dwelling)에 관한 철학적 논의.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annah Arendt” — 《인간의 조건》의 노동·작업·행위(vita activa) 구분과 행위의 의미.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Recognition” — 자기의식과 상호인정의 관계에 관한 헤겔 철학의 설명.

참고: https://namu.wiki/w/%EB%82%98%EB%8A%94%20%EB%82%98%EB%A5%BC%20%ED%95%B4%EA%B3%A0%ED%95%98%EC%A7%80%20%EC%95%8A%EB%8A%94%EB%8B%A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eidegger/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eg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