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서로를 구분하기 시작했을까 《기생충》 × 장자(莊子)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영화 《기생충》이 보여주는 계급의 의미
장자가 말한 차별과 구분의 허상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방법
우리는 왜 사람보다 직함과 신분을 먼저 보게 되는가
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처음 〈기생충〉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웃어야 할 장면에서 웃었고, 긴장해야 할 장면에서 긴장했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뭔가 찝찝하고, 뭔가 화가 나는 것 같은데, 그 대상이 영화 속 누구인지 정확히 짚을 수 없었습니다. 박 사장이 나쁜 사람인가? 기택이 잘못했나? 근세는? 문광은? 그 물음들이 뒤엉킨 채로 집까지 걸어왔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는 영화라는 게 있다면, 저에게는 이 작품이 그랬습니다.
그 집엔 냄새가 있었다
〈기생충〉이 구사하는 계급의 언어는 무척 감각적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가난을 '냄새'로 표현합니다. 기택이 박 사장에게서 감지하는 그 미묘한 표정, 선을 넘는다는 말 한마디가 만들어내는 서늘한 공기. 계급의 경계는 벽이나 철창이 아니라 냄새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반지하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입니다. 완전한 지하도 아니고 완전한 지상도 아닌 곳. 창문을 열면 거리의 발목 높이가 시선에 들어오는 그 공간은, 이 가족이 세상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봉준호는 〈설국열차〉에서도, 〈옥자〉에서도 공간의 위아래로 계급을 그려왔는데, 〈기생충〉에서 그 문법은 가장 정교하게 완성됩니다.
저를 오래 붙들었던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 박 사장 가족이 캠핑에서 일찍 돌아올까봐 기택 가족이 거실에서 숨죽이던 그 장면. 그리고 그날 밤 물이 불어 반지하로 돌아온 기택의 집. 같은 밤의 비가 누군가에게는 낭만이고 누군가에게는 재앙이라는 것. 그 비가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동안 저는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장자가 말한 것: 이름이 사람을 가두기 시작할 때
장자의 『제물론』은 꽤 불편한 텍스트입니다. 이 편은 한마디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구분은 사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이야기를 2,300년 전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 귀하고 천함, 성공과 실패. 장자는 이 기준들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관점의 산물이라고 봤습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진다는, 그게 바로 제물(齊物)이라는 개념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만물을 고르게 본다, 즉 어떤 것도 본래부터 위이거나 아래인 것은 없다는 뜻이죠.
〈기생충〉의 "선을 넘네"라는 대사를 이 맥락에서 들으면 소름이 돋습니다. 그 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선을 모두가 믿고 있습니다. 박 사장도, 기택도, 심지어 관객인 저도. 장자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선을 긋고 그 선이 원래부터 있었다고 착각하면서 서로를 그 선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구분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2025년 고용노동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기획 감독 결과는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 사이에서도 수당, 퇴직금, 복지 혜택이 달랐음을 드러냈습니다. 출처: KBS뉴스 일의 내용이 아니라 '이름표'가 처우를 결정한 겁니다. 장자가 이 결과를 봤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이 그 사람의 가치인가?"
퇴직 후에야 보였던 것들
이 글을 쓰면서 꺼내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정규직 직장인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정규직이 누리는 안정이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사실 그게 특권이라는 생각조차 잘 못 했습니다. 불만은 있었습니다. 조직 문화가 답답하다든가, 처우가 충분하지 않다든가. 하지만 그 불만은 어디까지나 안정이라는 바닥 위에 서 있었습니다.
퇴직 후 재취업을 시도하면서 그 바닥이 얼마나 두꺼운 것이었는지를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나이도 있고, 새로운 업종에 전문 경력도 없으니 정규직 채용의 문은 애초에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겨우 단기 일자리 계약직으로 들어가니, 그 안에서의 시선이 달랐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 저는 어느 순간 투명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름표가 바뀌자 제가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가 실제로 달라진 것처럼 대우받았습니다.
그 경험이 〈기생충〉을 다시 볼 때 완전히 다른 장면들을 건드렸습니다. 기택이 쓰레기통 뒤에 숨는 장면, 기우가 명함 한 장에 삶이 뒤바뀌기를 기대하는 장면. 그게 단순히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저는 이제 좀 압니다. 이름표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를.
제물론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 아닐까 싶습니다. 본래 사람은 그렇게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든 구분이 사람을 나눕니다. 그리고 그 구분이 충분히 오래되면, 그 구분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출처: 장자, 『장자』 내편 〈제물론〉, 안동림 역, 현암사 장자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 감각을 정면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기생충〉이 보여주는 계급 구조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 공간의 위계: 반지하 → 지상 → 저택 → 지하 벙커로 이어지는 수직 구조
- 냄새의 위계: 냄새 나는 사람과 나지 않는 사람으로 가르는 감각적 계급선
- 이름의 위계: 가정교사, 운전기사, 가정부라는 역할이 사람 자체보다 먼저 보이는 구조
- 선의 위계: 말해지지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거기까지만"이라는 불문율
이 네 가지가 동시에 작동할 때,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를 해부하는 장치가 됩니다.
암전된 화면 앞에서 자막이 올라갈 때, 저는 이 영화가 묻는 것이 "누가 나쁜가"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영화가 진짜로 묻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 선을 언제부터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는가. 그 선을 걷어내고 난 자리에,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장자도 봉준호도 그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질문을 제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인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 글을 쓰는 내내 놓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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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사람보다 직업과 신분을 먼저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사회가 만든 '선'을 넘어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은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