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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묻는다면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와 보부아르가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

cinema-1 2026. 9. 22. 05:16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반박할 말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억울하기도 한 그 기분.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를 보고 나서야 그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토리의 결말보다는 아다 해리스가 파리에서 마주한 장면들, 그 안에 숨어 있는 철학적 질문에 집중할 것입니다.

아다가 드레스 앞에서 멈춘 이유

1957년 런던, 가정부 아다 해리스는 고객의 옷장에서 크리스티앙 디올의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앤서니 페이비언 감독은 이 장면을 길게 끌지 않습니다. 아다의 손이 천천히 옷감에 닿고, 카메라는 그 손을 가만히 따라갑니다. 대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더 크게 들립니다.

저는 처음에 이 장면을 그냥 넘겼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명품을 탐내는 장면으로만 읽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아다가 멈춘 것은 드레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어떤 감각, 즉 "나도 아름다운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감각 앞에서 멈춘 것이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주체성(Subjectivity)이라고 부릅니다. 주체성이란 외부의 기준이나 역할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과 선택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아다는 평생 다른 사람의 집을 닦고, 다른 사람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녀에게 드레스 한 벌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주체성을 처음으로 인정한 순간이었습니다.

요즘 저도 비슷한 장면 앞에서 멈추는 일이 생겼습니다. 실업 이후 자원봉사센터에서 영상 편집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그저 실업인정 기간에 시간을 보내기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상 하나를 완성해서 지인에게 보냈는데,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아다가 드레스 앞에서 멈춘 것처럼요. '이게 별로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내가 이걸 만들었구나'라는 감각 때문이었습니다.

보부아르가 묻는 것, 사회는 언제부터 사람을 '끝난 존재'로 만드는가

아다가 파리 디올 매장에 들어서는 장면이 있습니다. 직원들의 시선이 그녀를 훑습니다. 낡은 외투, 투박한 구두,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다는 그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제가 새일센터 인턴을 마치고 구직활동을 하던 시간이 겹쳐 보였습니다. 자격조건 앞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그 느낌.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말년에 쓴 《노년(The Coming of Age)》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녀가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은 노화 자체가 아닙니다. 사회가 나이 든 사람을 타자(Other)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타자화란 한 사람을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특정 범주(노인, 청소부, 실직자)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뜻합니다. 보부아르는 이 시선이 사람의 가능성을 실제로 좁혀버린다고 보았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imone de Beauvoir).

보부아르에게 중요한 개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프로젝트(Project)입니다. 프로젝트란 거창한 사업 계획이 아니라, 앞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와 방향성 자체를 뜻합니다. 그녀는 인간이 프로젝트를 가질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주체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질 자격을 빼앗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간적 가능성 전체를 차단하는 일이 됩니다.

"이 나이에 무슨 꿈이야"라는 말이 왜 억울하게 들렸는지, 이제는 조금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말 안에는 이런 전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 "당신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다."
  • "그 욕망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 "그 에너지를 다른 데 쓰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 전제들은 친절한 충고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보부아르가 지적한 타자화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나이와 처지를 이유로 그 사람의 미래를 대신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 당신은 지금 '무엇을 가졌는가'보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다는 파리에서 드레스를 손에 넣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기억되는 이유는 드레스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녀가 파리로 가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그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표정들 때문입니다. 아다는 결과를 얻기 전부터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모으고, 비용을 계산하고, 낯선 도시를 걸어 다니고, 무시당하면서도 다시 그 문 앞에 섰습니다. 그 활동들이 쌓여서 아다가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불렀습니다. 에우다이모니아란 단순히 기분이 좋거나 재산이 많은 상태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좋은 방식으로 실제로 활동시키는 삶, 그 활동 자체가 행복의 내용이라는 뜻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Ethics).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핵심입니다.

이 관점에서 저는 지금 제 상황을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작년에 제가 구직활동을 하던 대학의 면접을 함께 준비했던 지인이 취업상담원으로 이직해 출근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축하하면서도 '나는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따라왔습니다. 그 질문은 무엇을 가졌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질문이었습니다. 직함, 소속, 고용 형태.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으로 바꾸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1. 저는 지금 영상을 편집하고 있습니다. 자르고, 붙이고, 음악을 얹고, 완성합니다.
  2. 지역 행사를 촬영하며 공동체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글을 쓰며 제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습니다.

정규직이라는 직함은 없습니다. 하지만 활동은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활동 안에 있었습니다. 직함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현실적인 생계 문제를 외면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구직활동은 계속해야 합니다. 꿈만 좇아서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아다 역시 무작정 파리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돈을 모으고, 비용을 따지고, 현실적인 준비를 한 뒤에야 출발했습니다. 꿈과 현실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향해 동시에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다가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저에게 아다의 디올 드레스 같은 것이 있다면, 지금은 영상 편집입니다. 아직 서툽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장면을 자르고 연결할 때, 그리고 완성된 영상을 보낼 때 재미있다는 느낌이 분명히 듭니다. 그 감각이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발견할 만한 것입니다.

 

영화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가다>와 보부아르&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아다는 파리에서 드레스 한 벌 이상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공간을 걸었고, 자기 삶에 아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꿈의 가치는 꿈을 이룬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 꿈을 따라가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그 과정이 삶을 두껍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독자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 안에,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욕망이 하나쯤 있지는 않으신가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나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내 삶의 가치를 판단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누군가의 취업, 승진, 경제적 성취와 나의 현재를 비교하면서 내가 가진 작은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지금의 나에게도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남아 있을까요?

그것이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영상, 그림, 여행, 공부, 글쓰기, 농사, 악기처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욕구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현실적인 생계를 어떻게 함께 가져갈 수 있을까요?

꿈과 구직활동을 서로 반대편에 놓기보다, 현실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조금씩 키워가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Anthony Fabian, 《Mrs. Harris Goes to Paris》(2022). 런던의 가정부 아다 해리스가 디올 드레스를 갖고 싶다는 꿈을 품고 돈을 모아 파리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Focus Features 공식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Simone de Beauvoir, 《The Coming of Age》. 보부아르의 노년론과 노년의 타자화에 관한 해설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를 참고했습니다.
  •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에우다이모니아를 덕에 따른 활동으로 이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를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B%AF%B8%EC%8B%9C%EC%A6%88%20%ED%95%B4%EB%A6%AC%EC%8A%A4%20%ED%8C%8C%EB%A6%AC%EC%97%90%20%EA%B0%80%EB%8B%A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beauvoir/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