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보호받고 있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 맹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벽에 스프레이로 글씨를 씁니다. 고용센터 외벽에, 큰 글씨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저는 한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습니다. 이 남자가 원하는 건 많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으로 대우받는 것. 그런데 그게 왜 이토록 어려운가. 영화가 묻는 건 복지 제도의 결함이 아닙니다. 더 오래된, 훨씬 더 무거운 질문입니다.
서류 앞에서 사라지는 사람
다니엘은 심장 질환 판정을 받습니다. 의사는 일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그에게 구직 활동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걸 보여야 돈을 준다는 겁니다. 전화는 45분을 기다려도 안 받고, 온라인 신청서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직접 창구에 가면 "규정상 여기서는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돌아옵니다.
이 장면들에서 제가 계속 떠올린 건, 악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담당 직원들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절차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오히려 더 섬뜩합니다. 악인이 없는데 피해자가 생기는 구조, 이걸 한나 아렌트식으로 말하자면 '악의 평범성'이랄까요. 악은 특별한 의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온다는 그 감각. 켄 로치는 이 구조를 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빌런'을 만들지 않습니다. 출처: 씨네21 영화 개봉 당시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이 작품의 힘은 특정 개인을 탓하지 않으면서도 시스템 전체를 기소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니엘은 서류 속에서 천천히 지워집니다. 사람이 아니라 케이스 번호가 됩니다. 그리고 켄 로치는 그 과정을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습니다. 흔들리는 핸드헬드도, 과장된 음악도 없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이 담담함이 오히려 분노를 만들어냅니다.
맹자가 복지 창구에 앉아 있었다면
맹자는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그가 계속 생각났습니다. 맹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
민귀군경(民貴君輕), 백성이 먼저라는 이 사상은 단순한 미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맹자에게 이건 정치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습니다. 국가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통치자는 통치자가 아닙니다. 출처: 맹자 梁惠王章句下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맹자는 통치의 정당성을 민심, 즉 백성의 삶이 나아지고 있는가에서 찾았습니다.
맹자가 말하는 인(仁)이라는 개념도 여기서 연결됩니다. 인은 그냥 '착함'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라고 하는 그 감각입니다. 다니엘의 창구 담당자에게 그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그 마음을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두었습니다. 규정이 인(仁)보다 강해진 순간, 행정은 사람을 보호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걸러내는 장벽이 됩니다.

복지를 시혜로 보는 시선과 권리로 보는 시선의 차이가 바로 여기서 갈립니다. 시혜라면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습니다. 권리라면 국가는 반드시 보장해야 합니다. 맹자는 후자 쪽이었습니다. 굶는 백성 앞에서 도덕을 설파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먹고 살아야 예의도 있고 염치도 있다고요. 즉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有恒産者 有恒心) 다시말하면 맹자는 백성들의 기본적인 삶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항산) 도덕적인 마음(항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의식주 등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누구나 방탕해지고 범죄나 악한 행동에 빠지기 쉽다는 현실적인 인간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켄 로치가 카메라를 드는 방식
켄 로치는 영국 사회의 균열을 오랫동안 찍어온 감독입니다. 1966년 〈캐시 컴 홈〉부터 시작해서, 그는 평생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렌즈에 담아왔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는 그 긴 여정의 어떤 결정판처럼 느껴집니다.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켄 로치의 연출에서 제가 주목하는 건 무엇을 보여주지 않는가입니다. 이 영화에는 다니엘이 절규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도 거의 없습니다. 그는 그냥 버팁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버팀이 끝납니다. 켄 로치는 그 끝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실처럼 보여줍니다.
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 다니엘이 복지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장면. 그 기다림의 길이.
- 케이티가 푸드뱅크에서 통조림을 손으로 직접 뜯어 먹는 장면. 그 굶주림의 실재성.
- 다니엘이 컴퓨터 자판을 두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치는 장면. 디지털 소외가 이렇게 구체적인 것임을.
- 마지막으로 읽히는 다니엘의 유서. 그 문장들의 무게.
이 장면들 앞에서 저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켄 로치의 리얼리즘은 관객을 동정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 차이가 중요합니다.
퇴직 후의 나, 그리고 이 영화
저는 요즘 복지 제도를 유난히 자세히 읽습니다. 실업급여 조건, 기초생활수급 기준, 재취업 지원 프로그램. 이걸 조사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아, 이제 나도 이쪽 사람이 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퇴직하고 지방으로 내려왔습니다. 겉으로는 귀농귀촌이라 말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도시에서 밀려난 느낌에 가깝습니다. 취업 문은 좁고, 미취업 중인 자녀와 함께 살아가는 현실은 만만치 않고, 이곳에서도 타지인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이따금씩 느낍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다시 보니, 이전과는 다른 지점에서 울컥했습니다. 다니엘이 분노하는 건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무시당한다는 느낌, 내가 사람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케이스 번호가 되어버렸다는 느낌. 그게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저도 어느 창구 앞에서 그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번호를 불러주는데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은, 그 기분.
맹자의 말이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현실의 언어로 들리기 시작한 건 그 즈음이었습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다"는 말이 진짜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창구 직원이 번호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다니엘의 유서는 이렇게 끝납니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아닙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한 명의 시민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다니엘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 시대, 어느 창구 앞에 번호표를 들고 서 있는 모든 사람의 말일 수도 있다고. 제도가 사람을 살리고 있는가, 아니면 걸러내고 있는가.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남습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국가가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행정의 효율성과 인간에 대한 배려는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복지는 혜택일까, 아니면 모든 시민이 누려야 할 권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