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권력은 생각하는 청년을 두려워할까─ 《박열》 × 한나 아렌트
재판정에서 박열은 조선 옷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선언이었습니다. 굴복하지 않겠다는, 당신이 정의한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법정이 아니라 철학 강의실을 떠올렸습니다. 박열이 권력을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본질을 해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의 박열,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인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독립운동 서사 정도로만 받아들였습니다. 두 번째로 봤을 때, 재판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습니다. 일본 제국의 검사들이 박열을 심문하는 동안, 정작 당황한 쪽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는 답을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되돌려 보냈습니다. 왜 국가는 인간의 사상을 두려워하는가, 라고.
한나 아렌트는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남겼습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인데,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뒤 아렌트가 도달한 사유입니다. 거대한 악은 괴물 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한 평범한 인간들의 무사유(thoughtlessness), 즉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상태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이것이 아렌트가 그토록 '생각하는 인간'을 강조한 이유입니다.
영화 속 일본 제국주의의 관료들은 바로 그 무사유의 집합체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침묵을 강요하고, 질문을 봉쇄하고, 순응을 제도화하는 것. 아렌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가장 정교한 작동 방식입니다. 전체주의란 단순히 폭력으로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 자체를 소거시키는 체제를 뜻합니다.
그리고 박열은 그 소거를 거부한 사람이었습니다. 제 해석으로는, 그의 저항은 총을 든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이 만들어낸 언어, 권력이 설정한 심판의 틀 자체를 무너뜨리려 했으니까요.

요즘 선거 이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지만, 주변을 보면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생업이 바쁘기도 하고, 괜히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가 불편해질까 싶어 조용히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침묵의 무게를 느낍니다. 그런데 《박열》을 다시 보고 나니 그 침묵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아렌트가 경고한 바로 그 무사유가, 백 년 전 경성 거리가 아니라 지금 제 주변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서양의 아렌트와 동양의 의(義), 두 사유가 만나는 곳
이 지점에서 저는 동양 철학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게 됩니다. 아렌트의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사실 동양 사상과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겹쳐집니다.
유교에서 핵심 덕목 중 하나인 의(義)는 단순히 '의리' 정도로 번역하면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의(義)란 상황이 어떠하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힘, 즉 자기 내면의 도덕 기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맹자는 의(義)를 인간이 본래부터 가진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잘못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과 연결지었습니다. 이 감각을 잃는 순간 인간은 그저 체제의 부품이 됩니다.
다음은 박열의 태도를 아렌트와 동양 사상의 관점에서 나란히 놓고 비교한 것입니다.
- 아렌트의 시각: 박열은 무사유를 거부한 인간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전체주의에 저항했습니다.
- 유교의 시각: 박열은 의(義)를 실천한 인간입니다. 체제의 압력 앞에서도 수오지심을 잃지 않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했습니다.
- 도교의 시각: 노자의 무위(無爲)는 흔히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오해되지만, 본래 의미는 억지로 강요된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본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는 것입니다. 박열이 권력이 설정한 프레임을 거부하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이 무위의 저항과 닮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렌트와 동양 사상 모두 '내면의 기준'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아렌트가 말한 '생각하는 능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교의 의(義)도 외부 권위가 아닌 자기 내면의 도덕 감각에서 나옵니다. 형식은 달라도 두 사유가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입니다. 권력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 바깥에서 스스로 사유하라, 는 것.
6·10 만세운동의 학생들 역시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단순한 감정적 분출이 아니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박열》은 개봉 이후 235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청년 관객층의 호응이 높았던 작품입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그 숫자가 단순한 역사 교육의 결과라기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박열의 질문 속에서 자신과 닮은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무기를 든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박열은 그것을 몸으로 증명했고, 아렌트는 그것을 언어로 남겼으며, 유교의 의(義)는 그것을 덕목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사유가 같은 하나의 인간 조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침묵이 편안한 시대일수록, 질문은 더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민주주의는 거창한 제도가 아니라, 그 불편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집합 위에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박열이 법정에서 조선 옷을 입고 앉았던 그 순간처럼, 스스로 선택한 언어와 자세로 세계 앞에 서는 것. 그것이 지금 시대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오래된 질문일 것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1987》 × 존 롤스
→ 민주주의는 왜 쉽게 흔들리는가
2️⃣ 《브이 포 벤데타》 × 미셸 푸코
→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을까
3️⃣ 《변호인》 × 공자
→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생각해볼 질문
나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가?
권력은 왜 질문하는 사람을 두려워할까?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은 왜 어려운 일일까?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97%B4_(%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endt/
https://www.kob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