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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 마르틴 부버: 서로 다른 삶을 인정하는 법

cinema-1 2026. 7. 19. 23:05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역설이 있습니다. 〈호프〉는 괴생명체와 인간의 싸움을 그린 장르영화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전혀 다른 질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서로를 모르면서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 그럼에도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호포항이라는 세계, 그 경계에서 벌어지는 일

영화의 배경은 휴전선 인근 작은 항구 마을 호포항입니다.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공간, 육지인지 바다인지 경계가 모호한 항구, 그리고 그곳에 내려온 존재들. 감독은 처음부터 이 영화를 '경계의 이야기'로 세팅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경찰 고범석은 황소 사체를 확인하러 나왔다가 마을 전체가 무너진 것을 목격합니다. 그가 가진 것은 산탄총 하나뿐이고, 지원은 오지 않습니다. 상부는 산불을 이유로 손을 뗐고, 지역 예비군은 11명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범석이 혼자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혼자인 상황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 방식으로만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노인들은 출처불명의 M16을 들고 나타나고, 낙연은 오인사격을 받고도 합류하고, 양배는 냉동고에 외계인 사체를 넣어두었습니다. 범석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전부 '통제 불가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무질서해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통제와 이해 사이 어디쯤에 공동체가 있는지를 묻는 듯합니다.

저는 이 장면들에서 자꾸 다른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틀렸다'고 규정해 왔는가, 라는.

외계인이 운다는 것의 의미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괴물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입니다. 경찰차로 추격하던 범석은 조준을 하다가, 그 거대한 생명체가 매우 슬픈 표정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합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은 더 강렬합니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 생명체는, 자식을 잃은 어미였던 것입니다. 양배에게 사살당한 어린 외계인의 부모가, 새끼를 찾으러 지뢰밭을 건너 인간의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범석이 양배에게 뱉는 말이 있습니다. "다 자라지도 않은 어린 새끼를 죽여?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 분노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범석 자신이 조금 전 그 생명체의 눈물을 직접 봤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냥 괴물이었던 존재가, 그 고통의 표정 하나로 완전히 달라 보이게 됩니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상대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방식, 또 하나는 상대를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 만나는 방식입니다. 부버는 전자를 '나-그것', 후자를 '나-너' 관계라고 불렀는데 출처: 마르틴 부버 《나와 너》(1923), 이 개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냥 이렇게 생각해도 충분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라고 묻는 순간과,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온 걸까?"라고 묻는 순간의 차이라고.

 

 

영화<호프와> 마르틴 부버의 사상 이미지

 

 

〈호프〉의 외계인들은 인간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름도, 사정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에 그들도 서로를 지키려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베이요는 조르의 아들 칼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다짐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붙들기로 하는 그 장면은, 인간이라는 기준 없이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읽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희망

저는 이 영화를 혼자 봤습니다. 남편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영화관을 잘 찾지 않으니까요. 저는 공무원 생활을 마친 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지금은 귀농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 남편은 자동차정비 쪽으로 새 출발을 했고, 농촌에서 자랐으면서도 귀농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아침형, 남편은 야행성입니다.

예전에는 이 차이들이 답답했습니다. 같이 영화를 보고 싶었고, 귀농 계획에 동참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호프〉를 보고 나오면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한 것인가, 아니면 남편이 나처럼 되길 원한 것인가.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고, 믿음도 없고, 누구 하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 범석은 지원도 없이 혼자 괴물을 쫓습니다.
  • 노인들은 경찰의 말을 무시하고 직접 총을 듭니다.
  • 낙연은 오인사격을 당하고도 끝까지 같이 움직입니다.
  • 양배는 냉동고에 외계인을 넣어두고 뒤늦게 신고합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버텼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마을은 살아남습니다. 일사분란한 협력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충돌하면서도 겹쳐지는 그 과정이 결국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부버는 '나-너' 관계가 상대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만남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출처: 씨네21 철학 에세이 참고 상대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관계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귀농을 준비하면서 저는 혼자 농지은행을 알아보고, 혼자 귀농인의 집에서 실습을 했습니다. 남편은 조용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 조용함이 무관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걸음의 속도가 다를 수 있고, 준비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을 '틀렸다'고 부를 수 있는 기준이 과연 내게 있는가, 하는 질문이 영화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극장을 나오면서 한 가지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괴물 앞에서 범석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던 그 순간. 이해가 행동보다 먼저 온 그 찰나. 저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과연 그런 순간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일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옆 사람의 눈물을 볼 여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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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기준에 맞추려 하고 있는가?
서로 다른 취미와 삶의 방식은 갈등의 원인이 될까, 아니면 서로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자산이 될 수 있을까?
오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다름을 존중하기 위해 어떤 작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참고: https://gyeongroksong001.tistory.com/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