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직장 다녀와서 게임만 하겠다고 한다면 《굿 윌 헌팅》과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부모의 거리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것이 정말 사랑일까요? 저는 최근에 이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춰 섰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아들이 "이제 다 그만두고 게임이나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저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걱정과 답답함이 동시에 몰려왔고, 그 감정들 사이에서 《굿 윌 헌팅》과 에픽테토스가 떠올랐습니다.
게임만 하겠다는 아들, 그 말 뒤에 무엇이 있을까
아들은 월세 일부를 지원받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사회복지사 과정도 병행하고, 컴퓨터활용능력 시험도 준비하고, 수영도 새로 시작했습니다. 겉에서 보면 꽤 열심히 살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내려놓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처음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세도 지원해주는 직장을 왜 그만둬? 그리고 지자체 인센티브가 아깝잖아." 하지만 잠시 후에 다른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들이 정말 지치고 힘든 건 아닐까? 그 말 뒤에 제가 못 보고 있는 감정이 있는 건 아닐까?
이 지점에서 《굿 윌 헌팅》이 생각났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윌 헌팅은 누가 봐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청년입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좀처럼 쓰려 하지 않습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이 인물은 아들이 태어난 1997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에 스크린에 등장했습니다. 최근 《오디세이》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맷 데이먼의 연기를 다시 떠올리니, 그 시절 윌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겹쳐졌습니다.
영화에서 심리치료사 숀이 윌에게 하는 일은 설득이 아닙니다. 그는 윌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기다립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하나의 힌트였습니다. 사람은 정답을 들려준다고 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자기결정이론(SDT, Self-Determination Theory)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기결정이론이란, 인간이 외부의 강요보다 내면의 동기에서 비롯된 선택을 할 때 더 지속적으로 행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아들에게 "직장 계속 다녀야 해"라고 말하는 것이 효과가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것: 통제의 경계를 긋는 연습
에픽테토스는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대표적인 사상가입니다. 스토아 철학이란 외부 환경보다 자신의 내면 반응과 판단에 집중함으로써 평정심을 유지하는 철학적 태도를 말합니다.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개념은 '이분법적 통제(Dichotomy of Control)'입니다. 이 개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 감정을 소모하지 말라는 원칙입니다.
저는 이 원칙을 지금 제 상황에 직접 적용해봤습니다.
부모인 제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들이 직장을 계속 다닐지 여부
- 아들이 사회복지사 시험을 볼지 여부
- 아들이 게임을 하루에 몇 시간 할지
- 아들이 부모의 말을 받아들일지 여부
반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 월세를 얼마나, 언제까지 지원할지
- 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낼지
- 제 자신의 경제적 준비를 어떻게 이어갈지
- 지원의 조건과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저도 지금 계약 만료로 실업 상태입니다. 실업급여를 신청해둔 상황이라 제 자신의 생활도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들의 월세까지 계속 부담하는 것이 맞는지, 솔직히 말해서 저는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픽테토스의 이분법적 통제를 기준으로 생각하니 조금은 정리가 됐습니다. 아들의 결정을 바꾸려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제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경계를 먼저 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심리적 경계 설정(Psychological Boundary Setting)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심리적 경계 설정이란, 관계 안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스스로 인식하고 상대에게 명확히 전달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여기까지는 도울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렵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 경계 설정의 한 형태입니다. 그것이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제 경험상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부모 쪽에서 먼저 무너집니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국내 20대 청년의 심리적 소진은 적지 않은 수준입니다. 2023년 기준 청년층(19~34세)의 정신건강 위험군 비율은 17.8%로 집계되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아들의 "다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번아웃(Burnout), 즉 만성적인 직무 스트레스와 소진 상태에서 나온 신호일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그리고 부모의 자리
부모가 자녀를 믿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한동안 이것을 "언제든 도와주겠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진정한 신뢰(Trust)란 상대가 스스로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임을 믿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론에서도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상대의 성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프롬은 자신의 저서에서 성숙한 사랑이란 상대의 자율성(Autonomy)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율성이란 타인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삶을 선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부모가 모든 결과를 대신 막아주면, 자녀는 이 자율성을 발휘할 기회 자체를 잃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맞다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실업급여가 나오면 조금은 도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확답은 어렵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저도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필요한 불편함이었습니다. 아들도, 저도, 각자 자신의 삶 앞에 서야 할 시간이었으니까요.
《굿 윌 헌팅》에서 숀이 윌에게 했던 것처럼, 부모도 자녀에게 때로는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직장이 싫어?"가 아니라 "직장에서 어떤 감정이 제일 힘들어?"라고. 다그치는 질문이 아니라 자녀가 스스로 자기 내면을 바라보도록 돕는 질문 말입니다. 이것이 저는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 자녀와의 갈등에서 부모가 가장 많이 호소하는 어려움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경계 혼란이었습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저도 그 혼란 속에 있었고, 지금도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닙니다. 다만 에픽테토스가 말한 이분법적 통제를 생각하며 조금씩 경계를 그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부모의 자리는 자녀의 앞이 아니라 옆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에 서서 길을 막거나 대신 걸어주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다가 자녀가 먼저 손을 내밀 때 잡아주는 것. 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지금 이 시기 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가장 필요한 연습이기도 합니다.
아들의 삶은 아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도 여전히 저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자꾸 잊게 되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도 저는 그 경계를 기억하려 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심리 상담이나 법률·재정 조언이 아닙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자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녀의 선택을 통제하려 하고 있는 것일까?
- 자녀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과 자녀의 책임을 대신지는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
- 자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믿어주면서 나 역시 나의 삶을 살아간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참고: https://namu.wiki/w/%EA%B5%BF%20%EC%9C%8C%20%ED%97%8C%ED%8C%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