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아들이 음식을 거절했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가족》 × 퇴계 이황

cinema-1 2026. 9. 10. 05:11

가족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피에서 올까요, 아니면 함께 밥을 먹은 시간에서 올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질문 앞에서 꽤 오래 멈췄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아들이 제가 만든 단호박 수프를 단칼에 거절했을 때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습니다.

사랑은 동사인가, 명사인가

가족을 혈연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과 제도도 그렇게 규정합니다. 그런데 철학은 늘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그냥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고 선택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가족》의 인물들은 이 말을 몸으로 살아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서로를 먹이고, 재우고, 걱정합니다. 반면 유리를 낳은 부모는 법적으로 엄연히 가족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묻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요?

프롬은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다"라고 썼습니다(출처: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이 말이 《어느 가족》과 겹쳐 읽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 속 가족은 사랑을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냥 합니다. 아이 옆에 눕고, 훔친 음식을 나누고, 비밀을 같이 안고 삽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 영화는 끝까지 판결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이 가족이 낯설고 불편했습니다. 도둑질을 하는데 따뜻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진심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래 믿어온 가족의 문법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퇴계가 말한 '경'은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은 한국 성리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그의 사상 중심에는 경(敬)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경이란 단순히 남을 공경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멈춰 살피는 태도, 그것이 경입니다. 흔들리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가깝습니다.

아들이 수프를 거절했을 때, 저는 순간 멈췄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화를 낼 준비를 하던 제 마음이 보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는데'라는 생각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라보고 나니 다음 문장이 저절로 왔습니다. '아들의 선택은 아들의 것이다.' 화가 더 커지지 않았습니다. 퇴계라면 이것을 경의 첫 번째 연습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퇴계의 경 사상은 자기 수양(Self-cultivation)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기 수양이란 외부 세계를 내 뜻대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반응하는 내 안을 다듬는 일입니다. 이것이 서양 철학과 겹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 퇴계와 에픽테토스는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셈입니다.

《어느 가족》의 인물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구별을 몸으로 압니다. 법적인 가족이 되는 것은 이들의 선택 밖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밥을 같이 먹는 것, 오늘 옆에 있는 것은 그들이 매일 선택하는 일입니다.

 

영화 <어느 가족>과 퇴계 이황의 철학 사상 이미지

 

가까울수록 경계를 잊는 이유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중반 이후, 이 가족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비밀이 쌓이고, 서로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상대의 선택을 가로막는 일이 생깁니다. 사랑이 소유로 기울어지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아팠습니다. 왜냐하면 제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저는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조금만 더 참고 다녀봐."
  • "그 일은 그만두지 않는 게 좋겠다."
  • "이 공부는 계속해야 하지 않겠어?"
  • "좋은 기회인데, 왜 안 가려고 해?"

처음엔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들이 말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제 걱정이 아들에게는 압박으로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하면서 '연금 수급을 위해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가족'의 뉴스에서 출발했다고 밝혔습니다(출처: 일본 영화 데이터베이스, JMDB). 그 뉴스 속 가족도, 법과 감정 사이에서 경계가 무너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 경계는 쉽게 허물어집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요즘 저는 구직 중입니다. 기간제 일자리에도 불합격 통보를 몇 번 받고 나니, 구직사이트 화면을 여는 일이 예전과 다릅니다. 이럴 때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직업으로 재단하기 쉽습니다. '지금 직장이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날 단호박 수프를 만들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수프는 성공했습니다. 아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실패했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수프를 잘 만드는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아들이 먹을지 말지는 처음부터 아들의 몫이었습니다.

이것을 경(敬)의 언어로 다시 쓰면 이렇게 됩니다. 제가 돌볼 수 있는 것은 제 마음과 제 행동입니다. 아들의 마음은 제가 돌볼 수 없습니다. 실업이라는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원서를 쓰는 일, 봉사활동을 찾아보는 일, 텃밭에서 작물을 손질하는 일, 좋은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 이것은 제 안에 있는 일들입니다. 불합격이라는 결과는 제 밖에 있습니다.

《어느 가족》이 끝내 묻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줄 수 없는가. 그 경계를 아는 것이 사랑의 성숙인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끝나고 남는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피입니까, 시간입니까, 선택입니까. 저는 아직 완전한 답을 모릅니다. 다만 오늘, 아들의 선택을 아들에게 돌려주고 제 수프를 혼자 먹으면서,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족과 가까워진 것인지, 아니면 저 자신과 가까워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게 같은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자녀를 걱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녀의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는 것일까?
  •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도움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하기보다 내 마음을 돌아본다면, 오늘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참고: https://namu.wiki/w/%EC%96%B4%EB%8A%90%20%EA%B0%80%EC%A1%B1
어느 가족 - 예스24
https://www.jmdb.ne.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