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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채소를 다듬고 나서 <경주기행>을 보았다 — 복수, 애도, 그리고 시간에 관한 짧은 사유

cinema-1 2026. 9. 11. 05:12

냉장고를 열었을 때, 텃밭에서 가져온 채소들이 반쯤 시들어 있었습니다. 가지, 호박, 양배추. 다듬고 버리고 정리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고서 본 영화가 하필 복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시든 채소를 정리하는 일과 8년 된 한을 들고 경주로 향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어딘가 겹쳐 보였습니다. 둘 다, 시간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멈춰 있는 시간에 대하여 — 복수는 왜 하고 싶어지는가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엄마 옥실은 8년을 기다렸습니다. 막내딸 경주가 돌아오지 않은 그날부터, 가해자가 출소하는 날까지. 그 8년이 얼마나 다른 시간이었을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복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복수는 의지가 시간에 대해 느끼는 혐오다." 조금 풀어 말하면,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복수의 뿌리라는 뜻입니다. 옥실에게 복수는 단순히 가해자를 향한 분노가 아닙니다. 딸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 되돌릴 수 없음에 대한 반항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엔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노란 봉고차가 경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면서, 저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이 영화가 묻는 것은 '복수는 옳은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왜 복수하고 싶어지는가'입니다. 그 질문은 나이를 가리지 않습니다. 억울했던 기억, 되돌리고 싶었던 순간 — 그게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법이 정의를 다하지 못할 때 — 아리스토텔레스와 남겨진 사람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정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출처: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사회의 이익과 부담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
  • 교정적 정의(Corrective Justice): 잘못된 거래나 피해를 바로잡는 것

법은 두 번째, 교정적 정의를 대신하려 합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방식으로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 교정이 충분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봅니다. 가해자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됩니다. 법의 눈에는 정의가 실현된 것이지만, 딸을 잃은 엄마의 눈에는 아무것도 교정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멈춘 이유는, 이게 단순히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비슷한 이야기는 있습니다. 제도가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고,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상실이 있습니다. 영화는 그 자리에서 복수를 정당화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 씁쓸함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바라봄이 오히려 더 오래 남습니다.

애도는 끝날 수 있는가 — 프로이트와 무상(無常)

프로이트는 1917년 논문 애도와 우울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애도(Mourning)란 잃어버린 대상을 향해 정신이 수행하는 작업이라고요(출처: 지그문트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 여기서 '작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프로이트에게 애도는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완수되면 우리는 다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멈추면, 그것은 우울증이 됩니다.

옥실의 8년은 그 작업이 끝나지 않은 시간입니다. 딸의 방은 그대로이고, 딸을 기다리는 마음도 그대로입니다. 그녀에게 시간은 흐르지 않았습니다. 멈춰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불교의 무상(無常) 개념이 겹쳐 보였습니다. 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하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텃밭의 채소가 시들듯, 계절이 바뀌듯, 모든 것은 흘러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잃은 이를 향한 기억만은 쉽게 무상해지지 않습니다. 데리다는 애도를 '타자에게 정의를 행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은 이를 기억 속에서 다시 살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복수도 하나의 애도일 수 있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말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식.

길 위에서 다시 흐르는 시간 — 가족이라는 이름의 연대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타자의 얼굴(The Face of the Other)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타자의 얼굴이란 내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가 나에게 윤리적 책임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말합니다. 그가 있기 때문에 나는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그 감각이요.

이 영화에서 옥실 곁에는 세 딸이 있습니다.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세 사람이 노란 봉고차에 함께 올라탑니다. 그 차 안에서 이들은 티격태격하고, 울고, 웃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여정은 처음부터 복수를 완성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멈춰 있던 가족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드는 여정이었습니다.

로드 무비(Road Movie)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길 위의 영화입니다. 이 장르가 특별한 이유는, 길을 걷는 동안 인물들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가는 길 자체가 이야기입니다. 경주기행이 복수극이면서도 로드 무비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복수는 이유였고, 진짜 이야기는 그 길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서로였으니까요.

중장년 관객이라면 옥실의 자리에서 이 영화를 볼 것 같습니다. 청년 관객이라면 세 딸의 자리에서 볼 것 같고요.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자리를 번갈아 앉았습니다.

복수는 시간을 되돌리지 못합니다. 그건 영화도 알고, 옥실도 아마 알았을 겁니다. 그러나 애도는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애도를 혼자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족이 됩니다. 아침에 시든 채소를 정리하면서 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도 어쩌면 작은 애도였는지 모릅니다. 지나간 계절을 보내는 일. 남은 것을 들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 영화를 보고 나서 정리해 놓은 채소들을 다시 봤을 때, 시들었지만 버릴 필요는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걸로 저녁을 해 먹었습니다. 별것 아닌 저녁이었지만, 조금 다른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애도가 있다면, 이 영화가 조용히 말을 건넬지도 모릅니다. 복수는 못 해도, 길은 떠날수 있다고.

 

영화 <경주기행>과 관련된 철학자들의 사상 이미지

 

생각해 볼 질문

  1. 복수는 과연 '정의'를 대신할 수 있을까?
    니체는 복수를 "의지가 시간에 대해 느끼는 혐오"라고 말했습니다. 영화 속 엄마 옥실의 8년은 법의 교정적 정의가 채워 주지 못한 공백 위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이 정의를 다하지 못할 때, 사적 제재(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복수는 결국 또 다른 상처를 낳는 악순환일 뿐인가? 만약 당신이 옥실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2. 애도는 언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애도가 끝나지 않으면 우울증이 된다고 했고, 데리다는 애도를 "타자에게 정의를 행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영화에서 옥실의 시간은 딸이 떠난 그날에 멈춰 있었지만, 여정을 통해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상실의 기억을 간직하면서도 삶을 다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잊는 것'과 '보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며, 애도의 끝은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3.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와 가족의 연대, 그 긴장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건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의 네 모녀는 잃은 딸을 위해 그 반대의 행동을 계획합니다. 복수라는 극한 상황에서, 보편적 윤리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충돌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 그리고 영화가 보여주듯, 그 여정 속에서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고통이 지닌 또 다른 힘일까요?

참고: https://namu.wiki/w/%EA%B2%BD%EC%A3%BC%EA%B8%B0%ED%96%89
다음 - 복수극 인줄 알았는데... 네 모녀가 여행 끝에서 깨달은 것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이트 <애도와 우울증>(1917),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