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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면 정말 행복해질까? 《위대한 쇼맨》 × 쇼펜하우어

cinema-1 2026. 6. 26. 00:04

〈위대한 쇼맨〉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그냥 즐거운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화면은 눈부시고, 음악은 귀를 당기고, 배우들은 빛났습니다. 그런데 자막이 다 올라가고 극장 불이 켜지는 순간, 뭔가 찜찜한 것이 남았습니다. 바넘은 결국 행복해졌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무대 뒤에 욕망의 민낯이 숨어 있는 영화, 그리고 그 구조를 오래전에 이미 설명해버린 철학자 쇼펜하우어. 이 글은 그 두 가지를 겹쳐 읽어보려는 시도입니다.


무대 위의 바넘, 그리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

영화는 거의 내내 들떠 있습니다. 마이클 그레이시 감독은 첫 장면부터 화려한 조명과 군무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넘이 빈손으로 서커스단을 세우고, 기이한 공연으로 뉴욕을 홀리는 이야기. 그 자체만 보면 꽤 전통적인 아메리칸 드림 서사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두 번째로 다시 볼 때, 저는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바넘이 처음 서커스 단원들을 모아 첫 공연을 성공시키는 장면,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동시에, 뭔가를 이미 갈망하는 눈빛이 겹쳐져 있습니다. 만족이 아니라 확인, 그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넘은 이미 충분했습니다. 가족이 있고, 사업이 성공했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상류층 사교 모임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를 데려와 유럽 순회 공연을 기획하는 그의 욕망은, 사실 예술에 대한 열정보다는 인정에 대한 갈증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바넘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을까요.


쇼펜하우어가 말한 '진자 운동' — 욕망과 권태 사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진자에 비유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고통스럽고, 얻고 나면 권태롭다고. 그리고 그 두 극단 사이를 인간은 평생 오간다고 봤습니다. 그가 이것을 '의지(Wille)'라는 이름으로 설명한 것은, 이 욕망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에서 솟아오른다는 뜻입니다.

출처: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한국어 번역판

저는 이 개념을 처음 교과서에서 접했을 때는 그냥 "비관적인 철학자의 푸념" 정도로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삶의 어떤 시기를 지나면서, 특히 제가 귀농귀촌을 했다가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쇼펜하우어의 저 문장이 갑자기 아프게 맞아 들어왔습니다. 나는 시골의 고요함에서 충분히 가졌는데도, 왜 또다시 새로운 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을까.

바넘도 그랬을 것입니다. 성공이 부족해서 불안한 게 아니라, 성공이 있는데도 불안한 것. 쇼펜하우어가 불편한 이유는 그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위대한 쇼맨과 쇼펜하우어의 인간욕망에 대한 이미지

 

 

 

영화에서 바넘의 욕망을 부추기는 구조를 정리해보면 이런 흐름입니다.

  1. 가난한 어린 시절 → 결핍으로 인한 성공 욕망 형성
  2. 서커스 성공 → 단기적 만족, 그러나 곧 상류층 인정 욕구 등장
  3. 제니 린드 순회 공연 추진 → 새로운 욕망의 연료로 예술을 도구화
  4. 가족 소외, 서커스 화재 → 욕망의 부작용이 현실로 돌아옴
  5. 원점 귀환 → 영화는 이를 회복으로 포장하지만, 쇼펜하우어라면 "다음 욕망까지의 잠깐"이라고 읽었을 것입니다

이 구조가 낯설지 않은 건, 그게 우리 대부분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라는 짧은 탈출구, 그리고 선택과 집중의 문제

쇼펜하우어가 암울한 결론만 내린 건 아닙니다. 그는 예술을 이야기했습니다. 음악, 회화, 공연 같은 것들이 인간을 잠시 욕망의 사슬에서 풀어준다고 봤습니다. 의지에서 한 발짝 물러서, 순수하게 바라보는 상태. 그게 바로 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예술 경험의 본질입니다.

출처: 씨네21, 〈위대한 쇼맨〉 리뷰

〈위대한 쇼맨〉의 공연 장면들이 유독 빛나는 이유를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무대 위에서 단원들이 노래하고 움직이는 그 순간만큼은, 바넘도, 관객도, 그리고 극장에 앉아 있던 저도 "더 많이"라는 생각에서 잠시 해방됩니다. 그 순간은 무언가를 증명하거나 얻으려는 욕망과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충분한 느낌.

다만 영화는 그 탈출구를 영속적인 해답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면 바넘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새로운 욕망과 마주합니다. 〈위대한 쇼맨〉이 단순한 성공 신화로 읽히지 않는 건, 그 반복을 영화가 결코 모른 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쇼펜하우어를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이것이었습니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는 것. 욕망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무언가를 만들게 하고, 새로운 곳으로 가게 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다음 욕망에 끌려다니기만 하면, 정작 지금 가진 것을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한 채 지나가게 됩니다. 저는 지금 이 질문 앞에서 막 멈추려는 중입니다. 더 넓게 퍼지는 것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깊어지는 것에 대해서.


자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바넘이 진짜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았던 순간은, 아마 더 많이 가지려다가 모든 것을 잃을 뻔했을 때였을 것이라고. 〈위대한 쇼맨〉이 끝내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달음질이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나는 알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정말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
성공을 추구하는 것과 현재를 즐기는 것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언제부터 행복보다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참고: https://namu.wiki/w/%EC%9C%84%EB%8C%80%ED%95%9C%20%EC%87%BC%EB%A7%A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