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지키는 사람이 법을 어긴다면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L.A. 컨피덴셜》 × 플라톤
처음 이 영화를 오래전에 TV 토요명화와 명화극장에서 상영하였을 때 저는 범죄 스릴러라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멈추게 됐습니다. 화면 속 경찰이 악당을 쫓는 장면이 아니라, 동료의 비리를 보고도 눈을 감는 장면에서였습니다. 그 표정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뉴스에서, 직장에서, 어쩌면 저 자신에게서도 본 적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권력이 드러내는 것들, 플라톤이 먼저 알고 있었다
《L.A. 컨피덴셜》은 1997년 커티스 핸슨 감독이 연출한 작품입니다. 배경은 1950년대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의 빛 뒤에 숨은 부패와 음모를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계속 한 가지 질문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권력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원래 그 사람이었던 것을 그냥 드러내는 것일까요.
플라톤은 이 질문을 『국가』에서 이미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그는 영혼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이성(Reason), 기개(Spirit), 욕망(Appetite)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이성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말하고, 욕망이란 쾌락이나 이익을 향해 끌리는 충동을 뜻합니다. 플라톤은 이 세 부분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정의로운 인간이 된다고 보았습니다(출처: 플라톤, 『국가』 4권).
영화 속 버드 화이트는 폭력적이지만 약자를 향한 기개가 살아 있습니다. 에드 엑슬리는 이성적이지만 승진 욕망이 그 이성을 자주 흔듭니다. 두 인물이 충돌하고 결국 같은 방향을 향하는 과정은, 플라톤의 영혼론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읽힙니다. 저는 이걸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습니다.
작은 타협이 조직의 언어가 되는 순간
솔직히 처음엔 영화 속 비리 경찰들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단기 일자리를 거치며 비슷한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조직의 총책임자가 부당한 금품 문제로 자리를 떠났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누군가는 "속이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사람 한 명이 사라지는 것으로 정말 무언가가 바뀌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정의로운 국가란 한 사람의 지배자가 선한 인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서 이성을 욕망보다 앞세우는 상태, 그 전체가 정의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패는 한 명의 악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작은 침묵과 타협이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 부패한 경찰 조직도 처음부터 그렇게 썩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순간들이 반복되었을 겁니다.
- "이번 한 번만 눈 감으면 되잖아."
- "나 혼자 말해봤자 바뀌는 게 없어."
- "다들 그렇게 하는데 나만 나서면 손해야."
이 세 문장은 영화 속 대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장들이 현실에서 훨씬 자주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누적될 때 조직 문화가 된다는 것도.
철인정치라는 이상, 그리고 현실의 간극
플라톤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개념을 철인정치(Philosopher-King)라고 부릅니다. 철인정치란 지식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욕망을 절제하고 공동체를 사익보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표현으로 바꾸면, 권한이 클수록 책임도 커야 한다는 원칙에 가깝습니다.
물론 현실은 플라톤의 이상과 다릅니다. 저도 압니다. 연일 뉴스에서 보이는 경찰 관련 소식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부실 대응, 고위직 자녀를 향한 봐주기 수사 이야기들은 경찰 전체에 대한 신뢰를 흔들기에 충분합니다. 민주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뉴스가 반복될 때, 저는 진짜 피로해집니다.
그런데 동시에 저는 이런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알게 된 지인의 남편은 경찰 고위간부이지만 늘 반듯하고 청렴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외출 중 사고를 당해 당황하고 있을 때 긴급 출동해서 사태를 빠르게 수습해준 경찰관도 있었습니다. 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영화나 뉴스의 부패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외가 아닌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특별한 괴물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출처: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것이 바로 영화 속 가장 무서운 인물이 거대한 악당이 아니라, 그저 조직의 논리에 순응한 평범한 경찰이었던 이유입니다.
정의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오늘 나의 자리에서
《L.A. 컨피덴셜》이 끝나고 한참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화려한 범죄 서사보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두 경찰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실 앞에 선 장면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진실을 선택했고, 한 사람은 그 선택을 지켜봤습니다. 둘 다 완전한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욕망보다 이성이 앞섰습니다. 플라톤이 말한 정의로운 인간의 조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정의론(Justice)이란 거대한 법 조항이 아닙니다. 정의란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개인의 정의가 쌓여 국가의 정의가 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습니다.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이 새로운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대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가정에서, 작은 공동체 안에서 매일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이 쌓여 제 인격이 되고, 제가 속한 조직의 문화가 됩니다. 큰 변화는 결국 작은 원칙이 반복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저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영화가 남긴 질문을 독자분들께도 그대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작은 권한을, 나는 정의롭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작은 타협 앞에서, 저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정답은 없지만 질문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시작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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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볼 질문
- 권력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만으로 완성될까요?
- 오늘 내가 속한 조직에서 신뢰를 지키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원칙은 무엇일까요?
참고: https://namu.wiki/w/LA%20%EC%BB%A8%ED%94%BC%EB%8D%B4%EC%85%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