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영화 《1987》로 보는 존 롤스의 정의론과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들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왜 영화 1987이 지금도 중요한 이유
존 롤스가 말한 “정의로운 사회”의 의미
민주주의는 왜 쉽게 흔들릴 수 있는가
공정한 사회는 단순히 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스타벅스코리아가 탱크 데이라는 마케팅을 활용한 텀블러를 출시했다가 5.18 유가족과 시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대표가 연일 사과문을 발표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처음 이 뉴스를 접했을 때 저는 단순한 마케팅 실수라고 넘기려 했습니다. 평소 직원들의 한결같은 서비스 및 응대 태도가 좋았고 접근성과 이용 편의성이 있어서 자주 애용하던 기업 이미지가 하루 아침에 땅에 떨어진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게 단순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사건에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낸 민주주의의 결과라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시민저항이 민주주의를 만든다는 것의 의미
민주주의는 한번 완성되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요즘 출근길에 시청 앞을 지날 때마다 다양한 시위 현장과 마주칩니다. 보육원 아동학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부모들, 송전탑 설치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 시멘트 공장 주변 대기오염 문제를 외치는 동네 사람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지만, 어느 순간 이분들이 하는 일이 사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작동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1987》을 다시 봤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영웅적인 인물을 그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자, 교도관, 대학생, 평범한 시민들이 각자 두려움을 안고도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5.18 관련 영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남아 있다는 신호로 저는 읽습니다.
시민 저항(Civil Disobedience)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시민 저항이란 부당한 법이나 권력에 맞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불복종하는 행위를 뜻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시민의 권리입니다. 롤스는 이 개념을 정의론에서 명시적으로 다루면서,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는 시민 저항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몇달 전인가 개인정보 유출사건을 발생시킨 쿠팡사건과 이번 스타벅스 불매운동도 이러한 시민 저항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Theory of Justice)은 1971년 처음 발표된 정치철학의 고전입니다. 여기서 정의론이란 사회 제도가 어떤 원칙 위에 세워져야 진정으로 공정한지를 탐구하는 철학 체계로, 특히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사고 실험으로 유명합니다. 롤스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내가 어떤 조건으로 태어날지 모른다면,지금 같은 사회를 선택할까?'. 어떤 계층, 성별, 능력을 가지고 태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 규칙을 설계한다면 어떤 원칙을 선택하겠느냐는 가상의 질문입니다. 이 틀로 보면, 누구도 처음부터 약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장 약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를 선택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롤스가 강조한 핵심 원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본적 자유(Basic Liberties)의 평등 보장: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은 어떤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다
- 공정한 기회균등(Fair Equality of Opportunity): 형식적으로 기회가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누구나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 사회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가장 약한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허용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원칙들이 생생하게 읽히는 이유는, 우리 주변이 아직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공정기회는 정말 존재하는가, 롤스정의론이 현실과 만나는 지점
공정한 기회균등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솔직히 그렇게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미세먼지 감시원으로 일하면서 재취업 과정을 경험해 보니, 서류나 면접이 형식적으로 열려 있다고 해서 기회가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경력은 좋으신데…" 라는 말 뒤에 이어지는 침묵은 대놓고 차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답이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다는 느낌이 분명했습니다.
이것이 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반적으로 준비가 부족해서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출발선 자체가 다른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롤스가 경계했던 형식적 기회균등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사회이동성(Social Mobili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회이동성이란 개인이 태어난 계층과 상관없이 노력에 따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세대 간 소득 이동성은 OECD 평균을 하회하고 있으며, 부모의 소득 수준이 자녀의 교육 및 취업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여전히 크게 나타나고 있습니다(출처: OECD).
우리 주변에는 이미 공정하지 않은 일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부의 편중, 채용 과정의 불투명성, 약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 이것들이 일상 속에 너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청 앞에서 만나는 시위대들이 외치는 내용들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규칙은 있는데 그 규칙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분노입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는 "5.18민주화운동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대표적 사례이자, 이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그 전환점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탱크 이미지 하나에 다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아직 그 역사가 현재형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는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Agora) 광장에서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인 실험입니다. 아고라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광장으로, 시민들이 모여 공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결정을 내리던 민주주의의 물리적 공간입니다. 수천 년이 지났지만 그 본질, 즉 시민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감시한다는 원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오늘도 시청 앞 피켓을 든 사람들과 스타벅스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소비자들을 통해 작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쉽게 흔들리는 것은 거대한 외부 세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순간, 불공정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조용히 체념하는 순간들이 쌓일 때 더 조용히 무너집니다. 롤스의 정의론이 발표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그 내용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아직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정한 기회를 단순히 채용 공고를 열어 두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누구나 동등한 조건에서 도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창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 입을 열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목소리를 내는 것이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많은 선배들이 목숨으로 만들어낸 이 공간을, 무관심으로 되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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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볼 질문
나는 지금까지 공정을 너무 결과만으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민주주의는 왜 끊임없이 지켜야 하는 가치일까?
누군가의 존엄이 무너질 때, 나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참고: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79125
https://www.oecd.org/social/soc/A-Broken-Social-Elevator-How-to-Promote-Social-Mobility-2018.pdf
https://www.humanright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