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선물은 사랑일까, 체면일까 《소공녀》와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정말 필요한 것
"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집보다 위스키와 담배가 중요하다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명절을 앞두고 마트 진열대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어느 오후, 저는 그 대사의 의미를 조금 다른 곳에서 만났습니다.
집을 포기한 여자가 진짜 지킨 것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먼저 말씀드립니다. 2018년 전고운 감독의 첫 장편 《소공녀》는 가사도우미 미소의 이야기입니다. 새해가 되면서 월세가 오르고 담배와 위스키 가격까지 올랐지만 그녀의 일당은 그대로입니다. 미소는 결국 집을 포기합니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킵니다.
처음에 저는 이 선택을 단순히 '기묘한 캐릭터 설정'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미소에게 집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고, 위스키와 담배와 사랑하는 사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순서를 스스로 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를 연출한 전고운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소가 집·직장·결혼처럼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갖는 인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회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설계하는 사람. 그것이 미소입니다.
제가 마트에서 멈춰 선 건 바로 그 질문과 마주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왜 이것을 사려는 걸까. 가족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면 명절이니까 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일까.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 욕망에도 급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는 인간의 욕망을 한데 묶어 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욕망 분류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 성격에 따라 나눠서 살펴보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그는 욕망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 자연적인 욕망: 삶과 건강, 관계를 위해 실제로 필요한 것들. 이 안에도 반드시 필요한 것과 자연스럽지만 필수는 아닌 것이 있습니다.
- 근거 없는 욕망: 명예나 끝없는 부처럼,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고 오히려 불안을 키우는 것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picurus)
에피쿠로스가 행복을 헬레니즘 시대의 화두로 삼은 건,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해진다는 믿음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아타락시아(Ataraxia), 즉 마음의 평온이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걸 명절 선물에 대입하면 이렇게 됩니다. "부모님께 드려야지"라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그런데 "작년과 같은 금액이 아니면 성의가 없어 보이겠지"라는 마음은 조금 다릅니다. 그건 받는 사람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향한 욕망, 에피쿠로스 식으로 말하면 근거 없는 욕망에 가깝습니다.
제가 마트 진열대를 다시 바라본 건 그 순간이었습니다. 화려하게 포장된 선물세트들. 조금 전까지 당연히 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보였습니다.

선물을 줄이자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명절을 준비하며 저는 예년과 다르게 움직였습니다. 먼저 시어머니와 형님께 직접 물었습니다. "필요한 게 뭐예요?" 돌아온 답은 간단했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했으니 몇 가지만 사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필요한 것을 물어보고, 필요한 것만 샀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뭔가 부족하게 준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년처럼 하지 못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솔직히 그 찜찜함은 꽤 오래 남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며 생각해 보니, 그 찜찜함의 정체가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걱정해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예년처럼 했어야 하는데, 라는 관성. 어쩌면 그것이 체면이라는 욕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선물을 줄이고 나서 오히려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밥을 한 끼 제대로 먹어야겠다. 어머니가 건강하신지, 형님 부부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건이라는 매개를 하나 덜어내고 나니 사람 자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친구와 나누는 관계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함께하는 식사, 안부를 묻는 대화, 서로의 시간을 나누는 것. 그것이 물질보다 더 직접적으로 관계를 만들어 준다고 본 것입니다. (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picurus)
미소가 집을 포기하자 오히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더 선명해진 것처럼, 저도 선물 몇 가지를 내려놓자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그 역설이 영화와 현실에서 묘하게 겹쳤습니다.
영화 《소공녀》는 적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영화가 아닙니다. 미소의 선택이 모두에게 정답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영화는 이 질문을 남깁니다.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어온 것인가.
이번 명절을 지내면서 저는 아주 작은 기준 하나를 새로 세웠습니다. 선물의 가격이 마음의 크기를 대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좋은 명절이란 많이 준비한 명절이 아니라,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한 번쯤 생각해본 명절일 수도 있겠다는 것.
마트 진열대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되는 그 순간이 온다면, 한 번만 물어보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껴서 필요한 척하는 것일까.
그 질문 하나가 꽤 많은 것을 바꿔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나는 지금까지 정말 필요해서 소비한 것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소비한 것을 구분하고 있었을까요?
명절 선물이나 각종 기념일의 소비 가운데 실제 필요와 사회적 기대가 섞여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내가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물건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함께 식사하기, 직접 찾아가기, 안부 묻기, 필요한 일을 도와드리기처럼 선물 외에도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셋째, 내 삶에서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소공녀》의 미소처럼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을 때 내가 반드시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 자료
- 전고운 감독, 《소공녀》(2018). 이솜이 연기한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집 대신 자신의 취향과 사랑을 선택하는 인물로 소개됩니다. 영화의 공식 소개와 관련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 《소공녀》에 대한 전고운 감독 인터뷰. 영화가 집·직장·결혼처럼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서 벗어난 미소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ncient Ethical Theory / Epicurus. 에피쿠로스의 자연적·필수적 욕망과 근거 없는 욕망의 구분, 그리고 마음의 평온을 중시하는 윤리학을 참고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86%8C%EA%B3%B5%EB%85%80(2018)
https://plato.stanford.edu/entries/epicu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