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모종 하나를 양보하고 생각한 농부의 의미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과 레오폴드의 대지윤리
딸기 모종 심기를 양보하면서 저는 멈췄습니다. 아주 작은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작두콩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생각했습니다. 농부는 도대체 무엇을 만드는 사람일까. 농산물이라고 대답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뭔가 부족합니다. 그 질문을 붙잡고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황무지에서 시작된 질문, 농장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존 체스터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8년을 기록한 이 다큐멘터리는 2019년 미국에서 완성되었고, 한국에서는 2023년에 정식 개봉했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초반, 체스터 부부가 캘리포니아 남부의 황폐한 농지에 처음 발을 디디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는 갈라진 흙을 천천히 훑습니다. 바싹 말라 먼지처럼 부서지는 땅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처음엔 이해가 안 됐습니다. 왜 저 땅을 선택했을까. 200에이커짜리 황무지 앞에서 희망을 품는다는 게 낭만인지 무모함인지 구분이 안 됐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 불안이 오히려 핵심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작물을 심으면 달팽이가 나타납니다. 달팽이를 잡으러 오리를 들이면 오리가 작물을 망가뜨립니다. 코요테가 닭을 물어갑니다. 사과나무에 벌레가 들끓으면 딱따구리가 몰려오고, 그 딱따구리가 결국 해충을 잡아줍니다. 하나의 문제가 다른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이 또 예상치 못한 해결로 이어집니다.
이 구조를 보면서 저는 귀농인의 집 밭을 떠올렸습니다. 고구마 줄기 사이에 엉켜 있던 덩굴, 잎을 갉아먹는 벌레, 뜻하지 않게 많이 온 비. 처음엔 그것들이 전부 방해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은 제 계획표를 읽지 않습니다.
레오폴드의 대지윤리, 땅은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토지윤리(Land Ethic)가 떠올랐습니다. 토지윤리란 윤리적 고려의 범위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흙, 물, 식물, 동물까지 포함하는 생태적 공동체 전체로 확장해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쉽게 말하면, 땅도 우리가 책임져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뜻입니다.
레오폴드는 인간을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토지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알도 레오폴드 재단은 이 사상을 "토양·물·식물·동물까지 포함하는 공동체의 윤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업을 이 시각으로 다시 보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수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땅을 수단으로 봅니다.
- "이 땅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땅을 관계로 봅니다.
올해 수확량을 늘리는 것과 내년에도 흙이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다른 선택입니다.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의 체스터 부부가 결국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생물다양성이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생물종이 공존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것이 처음엔 느리고 어려워 보였지만, 결국 농장을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만들어갔습니다.

영파머스마켓에서 본 것, 농부는 관계를 만드는 사람이다
오늘 저는 영파머스마켓에 갔습니다. 원래는 청주 농촌휴양마을 체험행사에 가려 했는데 아들 집에서 예상 못 한 일이 생겨 일정이 틀어졌습니다. 그러다 마켓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됐고, 작년에 봤던 딸기 스마트팜 청년농부가 생각났습니다. 잘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규모는 작았습니다. 유명한 대형 장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는 농부가 농산물만 들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봤습니다. 청년농부는 자신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설명했습니다. 어린 자녀를 데려온 부모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했습니다. 처음 보는 작두콩과 제주 긴 단호박을 판매하는 여성 농부는 각 농산물이 어떤 계절을 지나왔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딸기 모종 심기 체험을 양보했습니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대신 작두콩과 단호박을 사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봉지를 보면서 이상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이건 그냥 농산물이 아니구나. 그 뒤에는 누군가의 시간이 있고, 어떤 땅의 기억이 있고, 오늘 장터에서 나눈 짧은 대화가 있습니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농업을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사람과 토지, 지역사회가 함께 살아가는 문제로 바라봤습니다. 베리 센터는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소규모 농민 지원, 지역경제 보전, 농업교육을 연결하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베리가 말한 농본주의(Agrarianism)란 토지에 뿌리를 둔 삶의 방식으로, 땅과 사람과 지역이 분리될 수 없다는 철학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장터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한 농산물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생산자의 얼굴이 보였고, 소비자가 질문했습니다. 아주 작은 관계가 생긴 것입니다.
빈 객석과 빈 밭, 농촌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녁에는 무료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객석이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무료인데도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주자들이 텅 빈 홀을 향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낮의 장터가 겹쳐 보였습니다. 낮에는 농부들이 장터에 나왔고, 저녁에는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두 공간 모두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농촌의 문제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이 줄면 농산물을 사는 사람도 줄고,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줄고, 체험에 참여하는 아이도 줄어듭니다. 인구 감소는 경제 문제이면서 동시에 관계와 문화의 문제입니다.
《The Biggest Little Farm(위대한 작은 농장)》이 보여주는 농장도 그렇습니다. 사과나무 하나만 잘 자란다고 완성되는 공간이 아닙니다. 흙이 살아 있어야 하고, 곤충이 있어야 하고, 새도 있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연결될 때 비로소 농장이 살아납니다. 농촌도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농부가 있고, 소비자가 있고, 체험에 참여하는 아이가 있고,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모든 역할이 모여야 지역이라는 생태계가 유지됩니다. 레오폴드가 대지 공동체의 구성원을 흙과 물과 식물과 동물까지 확장했듯이, 어쩌면 농촌 공동체도 농부만의 공간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아직 귀농 이후의 삶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농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질문 하나가 달라졌습니다. "농촌에서 먹고살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에서 "나는 이곳의 어떤 관계 안으로 들어가 살아갈 것인가?"로 말입니다.
그 답은 아직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장터를 찾고, 모종을 양보하고, 빈 객석을 채우는 작은 행동들 속에 어쩌면 그 답의 조각이 하나씩 들어있을지도 모릅니다. 농부는 농산물만 키우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저처럼 농부가 아닌 사람도 그 관계망의 한 줄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작두콩 봉지 하나가 오늘 저에게 그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해 볼 세 가지 질문
첫째,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물은 농산물일까요, 아니면 농산물을 둘러싼 관계일까요?
농부와 소비자, 농부와 토지, 농부와 지역사회 사이의 관계가 농업의 지속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내가 농촌에 정착한다면 땅과 지역사회에 어떤 것을 돌려줄 수 있을까요?
농사를 짓는 것뿐만 아니라 지역의 행사에 참여하거나, 다른 사람의 농산물을 구매하거나, 자신의 재능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사람이 줄어드는 농촌에서 농업과 문화는 어떻게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청년농부의 장터와 빈 객석의 클래식 공연을 함께 떠올려 보면, 지역소멸은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참고 자료
《The Biggest Little Farm》(2019), John Chester 감독. 도시 생활을 떠나 200에이커의 황폐한 농지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농장을 만들어가는 8년의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입니다.
Aldo Leopold Foundation, The Land Ethic. 레오폴드의 토지윤리는 토양·물·식물·동물까지 공동체의 범위에 포함시키며 인간과 토지의 관계를 윤리의 문제로 확장합니다.
The Berry Center, Wendell Berry의 농업과 농촌공동체 사상. 소규모 농민, 토지 보전, 건강한 지역경제와 농업교육을 연결하는 농본주의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C%84%EB%8C%80%ED%95%9C%20%EC%9E%91%EC%9D%80%20%EB%86%8D%EC%9E%A5
https://www.aldoleopold.org/about/aldo-leopold/land-ethic/
https://berrycenter.org/ab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