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세상은 왜 이해되지 않는가-카뮈로 보는 부조리한 세계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부조리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가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처음 이 영화 제목을 봤을 때, 솔직히 요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노인 복지나 세대 갈등 같은 내용이겠거니 싶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전혀 달랐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느낌, 한 번쯤 겪어보셨다면 이 영화와 카뮈의 이야기가 분명 어딘가 와닿으실 겁니다.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 정의는 오지 않았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장면은 마지막이었습니다. 보통의 영화라면 주인공이 악당을 잡거나, 최소한 정의가 어떤 형태로든 실현되는 결말로 끝납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끝나버렸습니다. 허무하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영화의 핵심 인물인 안톤 쉬거는 이른바 '무동기 범죄자'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무동기 범죄란 가해자가 피해자와 어떠한 사전 관계나 명확한 목적 없이 범행을 저지르는 유형을 말합니다. 그는 동전 던지기로 사람의 생사를 결정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논리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합니다. 이처럼 이유 없는 선택과 결과는 미스터 노바디의 결정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제목에서 '노인'이 뜻하는 것도 나중에서야 이해했습니다. 영화 속 보안관 벨은 오랜 경험과 나름의 도덕적 질서를 지닌 인물입니다. 즉, 노인은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일정한 규칙과 인과관계로 돌아간다고 믿어온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이 영화 안에서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실제로 범죄학 관점에서도 동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범죄는 피해자와 사회 모두에 더 큰 심리적 충격을 남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성이 공포를 배가시키기 때문입니다. 미국 FBI의 범죄 분류 연구에 따르면 동기 불명의 범죄는 수사 해결률이 현저히 낮고, 피해자 주변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발생률도 높게 나타납니다(출처: FBI 범죄통계).
영화가 불편했던 것은 단순히 잔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내가 기대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너무 직접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뮈의 부조리: 세상은 원래 답을 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알베르 카뮈의 철학이 떠올랐습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란 인간이 의미를 찾으려는 욕망과, 그 의미를 끝내 내어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충돌을 뜻합니다. 여기서 부조리란 단순히 '이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Ontological) 긴장 상태를 가리키는 철학 용어입니다. 존재론적이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관한 질문과 관련된다는 뜻입니다.
카뮈는 대표작 이방인에서 이 개념을 뫼르소라는 인물로 형상화했습니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이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는 사회적 관습과 감정 표현의 규범을 거부하다가 결국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제가 이방인을 처음 읽었을 때도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행동하는가, 왜 이런 결말인가 하는 질문이 계속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카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세상은 원래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고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의 맥락에서 보면, 카뮈의 부조리론은 인간이 이미 주어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됩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의 존재가 본질보다 먼저라는 철학적 입장으로, 사르트르와 카뮈 등이 대표 철학자로 꼽힙니다.
부조리한 상황은 사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뉴스에서만 이해 못 할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마트에서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을 사거나, 계획에 없던 곳을 충동적으로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왜 그랬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도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일부가 아닐까 싶습니다.
카뮈 철학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상에서 의미와 이유를 찾으려 한다
- 그러나 세계는 어떠한 보편적 답도, 질서도 보장하지 않는다
- 이 충돌 자체가 부조리이며, 이것은 해소될 수 없는 조건이다
- 카뮈는 이 조건 앞에서 도피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반항하며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반항'이란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부조리를 인식한 채로도 계속 살아가는 태도 그 자체를 뜻합니다. 이러한 존재의 문제는
인터스텔라에서도 다르게 드러납니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머리로 알아도, 막상 이유 없는 불행이 찾아오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솔직히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뉴스를 보다 보면, '이게 내 주변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겠구나' 싶은 장면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거나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쩌면 소진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 문제는 조커에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통제 소재(Locus of Control)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통제 소재란 자신이 삶의 사건을 얼마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지를 나타내는 심리적 성향을 말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 내적 통제 성향이 지나치게 강할 경우, 통제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더 큰 심리적 타격을 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심리학회(APA)의 스트레스 연구에서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인지적 유연성이 높을수록 정신 건강 지표가 양호하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선택지는 단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의미를 포기하거나, 의미가 없어도 살아가거나. 카뮈 자신은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저도 요즘 그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집착하고 원망하는 데 쓰는 에너지보다, 오늘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편이 훨씬 덜 소모된다는 걸 조금씩 체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일이 생겼을 때 도움이 되는 접근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이유를 찾는 데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한다
- 의미가 없어도 오늘 할 일을 한다
이 네 가지가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이게 카뮈가 말한 '반항'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영화도, 카뮈도 그 느낌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느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 뿐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부조리한 일이 터질 때, 이걸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냥 인정하고 다음 걸음을 내딛는 것. 제가 이 영화에서 가져온 건 결국 그 태도입니다.
🤔 생각해볼 질문
나는 세상을 이해하려고만 하고 있는가?
설명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의미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