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은 끝났지만, 나는 끝난 것이 아니다《뷰티풀 마인드》 × 데카르트
계약이 끝난 사람은 정말 '끝난' 것일까요. 아니면 계약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남'으로 읽기로 결정한 것일까요. 저는 짐을 정리하던 그날 오후,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뷰티풀 마인드》를 다시 꺼내 본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고,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가 불현듯 떠오른 것은 그보다 또 며칠이 지나서였습니다.
사무실 짐을 쌀 때, 어떤 생각이 찾아왔는지
지방 지자체 공고를 보고 별 기대 없이 지원했습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따고도 나이를 이유로 몇 번이나 서류에서 걸렸던 터라, 근무 요청 연락이 왔을 때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통계조사 지원담당으로 들어간 그 자리는 시스템도 낯설고 용어도 생소했습니다. 그런데 25년 넘게 그 일을 해온 총관리자와 관리요원들 사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생겨났습니다. 시스템을 익히고, 조사작업실을 정돈하고, 서류 흐름을 파악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계약 만료가 다가오던 즈음, 일부 관리요원들은 이미 다음 조사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물품을 따로 챙겨두고, 몇 달 뒤 업무를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화도 조금 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음을 품고 있었고, 저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짐을 하나둘 챙기면서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나는 이제 필요가 없어진 걸까.'
그 생각이 얼마나 쉽게 찾아오는지, 그리고 얼마나 쉽게 사실처럼 굳어버리는지를 《뷰티풀 마인드》는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영화의 결말 일부를 언급하게 됩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존 내쉬는 자신이 보는 세계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그 세계는 완전히 실재했습니다. 영화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 점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틀릴 수 있고, 우리가 확신하는 해석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계약이 끝나던 날 제 머릿속을 채운 생각들도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현실이 아니라 불안이 만들어낸 해석.
방법적 회의(Methodological Doubt)라는 개념이 여기서 가닿습니다. 방법적 회의란 어떤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의심해보는 사고 방식을 말합니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태도입니다. '나는 쓸모없어졌다'는 생각도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불안이 만들어낸 그럴듯한 서사인지를.
코기토는 위로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한 끝에 남긴 한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코기토(Cogito)란 라틴어로 '나는 생각한다'는 뜻이며,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 명제입니다. 아무리 의심해도 지금 이 순간 의심하고 있는 '나'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출처: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이 문장을 처음 배웠을 때 저는 철학 교과서 속 고리타분한 명제 정도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짐을 다 싸고 텅 빈 책상 앞에서 이 말이 다르게 들렸습니다. 계약은 끝났지만, 지금 이 허전함을 느끼고 있는 저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직함이 붙어 있을 때도 저였고, 짐을 들고 나오는 이 순간에도 저라는 것.
이성주의(Rationalism)적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는 외부 조건에 있지 않습니다. 이성주의란 인간의 이성, 즉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지식과 존재의 근거라는 철학적 입장을 말합니다. 데카르트는 그 대표 철학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직업은 제가 가진 조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조건이 바뀌었다고 존재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뷰티풀 마인드》의 존 내쉬가 이 점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그는 환영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그 형상들은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불안을 없앤 것이 아니라, 불안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을 유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머문 장면입니다(출처: IMDb, A Beautiful Mind (2001)).
그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나이를 먹어볼수록 더 잘 알게 됩니다. 20대는 불안을 에너지로 바꾸는 속도가 빠릅니다. 40대, 50~60대의 불안은 조금 다릅니다. 축적된 경험만큼이나 묵직하게 가라앉습니다. 그럼에도 내쉬는 그 무게를 들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영화가 그것을 영웅 서사로 포장하지 않고, 일상의 선택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저는 좋았습니다.
계약이 끝난 자리에서 제가 다시 확인한 것들을 솔직하게 써봅니다.
- 시스템을 몰라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 전혀 다른 직업 세계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나이가 장벽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한 자리를 해낼 수 있다는 기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계약서에는 종료일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것들에는 종료일이 없습니다.
자기 성찰(Self-reflecti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 성찰이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거리를 두고 돌아보는 인식 행위를 말합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하려 했던 것도 결국 이 작업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물음표를 붙이는 일. 그 물음표가 때로는 위로가 됩니다. '나는 끝났다'는 문장에 물음표 하나만 붙여도 문장이 달라지니까요.
계약이 끝나도 경험은 남습니다. 당황했던 기억도, 낯선 시스템 앞에서 버텼던 기억도, 짐을 싸던 그 오후의 기분도. 생각하고 있는 저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여기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출발점이 됩니다.
지금 불안하다면, 그 불안이 사실인지 한 번만 의심해보시겠습니까. 《뷰티풀 마인드》가 남긴 질문도 결국 그것이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무엇이 진짜 끝난 것이고 무엇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를. 그 물음이 저에게는 가장 작고 단단한 다음 걸음이 되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인턴》 × 베버
→ 나이는 경험의 무게가 될 수 있는가
《록키》 × 니체
→ 어제의 나를 넘어서라
《리틀 포레스트》 × 장자
→ 조급함을 내려놓을 때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생각해볼 질문
- 지금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생각은 사실일까요, 아니면 해석일까요?
- 직업을 제외하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 다음 출발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한 걸음은 무엇일까요?
참고: https://namu.wiki/w/%EB%B7%B0%ED%8B%B0%ED%92%80%20%EB%A7%88%EC%9D%B8%EB%93%9C(%EC%98%81%ED%99%9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3827
https://www.imdb.com/title/tt0268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