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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알 수 없어도 행동할 이유가 있는가 《하얼빈》 × 알베르 카뮈

cinema-1 2026. 8. 15. 22:34

"나는 동양 평화를 위해 행동했다." 이 한 마디를 들었을 때, 저는 잠시 멍했습니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한 채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남긴 말치고는 너무 담담했기 때문입니다. 《하얼빈》은 그 담담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2026년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영화의 스포일러를 일부 다루고 있으므로,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결과를 모르면서도 움직이는 사람들

광복절을 앞둔 지난주, 저는 지인과 함께 지역 영상센터에서 《영웅》을 다시 봤습니다. 이미 한 번 본 영화였는데도 이번엔 유독 조마리아 여사의 장면에서 손을 꼭 쥐었습니다. 아들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어머니는 수의를 준비합니다. 살려달라고 빌지 않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은 아들의 행동이 반드시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까?"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하얼빈》은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우민호 감독의 이 작품은 1909년,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하얼빈으로 향하는 독립군들의 긴장과 불신을 담고 있습니다. 화려한 영웅담이 아닙니다. 누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역사를 언제나 결과부터 알고 봅니다. 독립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의 선택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었습니다. 오직 지금의 판단만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단순한 역사적 감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알베르 카뮈의 철학이 들어옵니다.

 

 

영화 <하얼빈>과 알베르 까뮈의 사상

 

 

시지프는 왜 다시 바위를 미는가

카뮈는 부조리(Absurd)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설명했습니다. 부조리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와 그 질문에 끝내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충돌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오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사이의 틈이 바로 부조리입니다.

카뮈는 이 개념을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통해 설명했습니다(출처: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 시지프는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정상에 닿으면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집니다. 그리고 또 밀어 올립니다. 끝이 없습니다. 성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위로가 된다는 건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카뮈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래도 해야 한다"는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시지프가 바위가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밀어 올리는 바로 그 순간에 주목했습니다. 그 태도 자체가 인간의 존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카뮈의 또 다른 개념인 반항(Revolt)이 등장합니다. 반항이란, 부당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이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인간의 의지를 뜻합니다. 단순한 분노나 폭력이 아닙니다. 현실이 원하는 대로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에서 이 반항이 결국 개인을 넘어 다른 사람과의 연대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출처: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알베르 카뮈 전집)). "나"의 반항이 "우리"의 존엄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얼빈》에서 독립군들의 움직임이 저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자기 한 사람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결과보다 먼저 오는 것

저는 몇 해 전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한동안 길을 잃은 것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출근할 곳이 없으니 하루가 이상하게 길고, 영화를 보면서 지나온 날들을 자꾸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때 제가 계속 붙들고 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봤자 안 될 텐데, 왜 해야 하지?"

그 질문은 사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는 스물다섯 살에게도,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려다 멈추는 쉰 살에게도.인생의 후반전에 돌입한 60대에게도.

그 시절 《하얼빈》을 봤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정확히는 카뮈를 이 영화와 함께 생각했다면 달랐을 것입니다.

카뮈가 말하는 의식적인 삶(conscious life)이란, 부조리한 세계를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직면하면서도 자신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삶에 명확한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한 진짜 자유입니다.

안중근의 삶을 이 시각으로 바라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행동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에 가까운 미래를 예상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었기 때문에 나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판단이 역사를 바꿨고, 그것은 그 순간의 선택에서 시작됐습니다.

우리의 삶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분명히 우리 각자의 삶을 만들어갑니다. 그 점에서 안중근의 이야기는 위인전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질문처럼 읽힙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하얼빈》과 카뮈를 함께 생각하면서, 저는 아래 질문들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도 내가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이 있는가?
  • 실패할 것 같다는 이유로 시작조차 미루고 있는 일은 없는가?
  • 나의 선택이 나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거창한 답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카뮈 역시 영웅적인 결단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늘 하루를 의식적으로 사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반항이라고 말했습니다.


광복절이 오면 저는 매년 안중근 의사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그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과를 알 수 없었음에도 행동했다는 사실이 오늘의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세계가 답을 주지 않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가치를 위해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하십니까. 저는 아직 그 답을 찾는 중입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 결과가 보장되지 않아도 내가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
  • 나는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 지금의 내 삶에서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가?

참고: https://namu.wiki/w/%ED%95%98%EC%96%BC%EB%B9%88(%EC%98%81%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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