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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희생해야 할까《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 에리히 프롬

cinema-1 2026. 8. 16. 18:13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를 지워가는 것과 같은 말일까요? 광복절 연휴에 남편과 시어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에 저는 이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두워질 때까지 밭에서 비료를 뿌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잡초를 뽑으러 나갔지만 하필 비가 내렸습니다. 결국 시어머니의 표정은 끝내 풀리지 않은 것 같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떠올렸습니다. 민규동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이 멈추는 장면에서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영화 속 어머니는 쉬지 않습니다. 밥을 하고, 빨래를 걷고, 남편의 잔소리를 흘려듣고, 자녀들의 일에 마음을 쓰면서 하루를 마칩니다. 카메라는 그 반복되는 손을 자주 보여줍니다. 아무 설명 없이, 그냥 움직이는 손을요.

저는 그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저 손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 손은 언제 쉬었을까.

영화가 아름다운 것은 그 손을 '위대한 헌신'으로 포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 사람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받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독일 출신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짚어낸 핵심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프롬은 사랑을 능동적 행위(active act)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능동적 행위란 감정에 이끌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책임·존중·이해 네 가지를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수동적으로 소모되는 것과는 다릅니다(출처: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어머니의 손이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사랑이었다면, 그 사랑은 프롬의 기준으로 어디쯤 있었을까요. 저는 솔직히 처음엔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과 소진은 겉모습이 너무 닮아 있으니까요.

기대라는 이름의 사랑

시어머니에게 농사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새벽에 밭으로 나가고, 계절마다 씨앗을 고르고, 수확한 것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는 그 전체가 살아온 방식이자 가족을 잇는 언어였을 겁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와서 함께 흙을 만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쩌면 시어머니 방식의 사랑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의 의미는 조금 달랐습니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하고, 그냥 가까이 있는 것. 그것도 분명 가족의 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쪽이 틀린 게 아닙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가 한 공간에서 부딪혔다는 것입니다.

프롬은 이를 '사랑과 합일의 혼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합일(fusion)이란 상대와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착각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도 반응해야 한다는 기대가 그 착각에서 나옵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나와 합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존중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이 구분이 흐릿해지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 가족은 가장 오래 함께한 관계라 서로의 방식을 '당연한 것'으로 굳혀버립니다.
  • 사랑한다는 전제가 있으니 기대가 실망으로, 실망이 원망으로 바뀌어도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 거절을 했을 때 '냉정하다'거나 '효도를 안 한다'는 평가로 돌아올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계속 맞춰줍니다. 지칠 때까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관계가 무거워집니다. 사랑해서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의무처럼 느껴지는 것, 이건 40대든 20대든 가족 안에 있어본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은 감각일 겁니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이미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도 사랑의 기술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술(art)이란 단순히 잘하는 방법이 아니라, 꾸준히 연습하고 성숙해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Erich Fromm"). 사랑도 반복과 실패를 통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익히는 걸까요.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며, 그것이 '거절할 줄 아는 용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 어머니는 거의 거절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짜증을 내도, 자녀들이 무심해도, 몸이 아파도 계속 움직입니다. 그 모습이 처음에는 숭고해 보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그 침묵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쌓여 있었는지가 느껴집니다. 이 장면이 저를 오래 붙잡은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번엔 어렵습니다."
"오늘은 쉬고 싶습니다."
"그건 제가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무정하거나 불효스러운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꺼내놓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더 오래 지속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계속 참다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보다, 중간에 작은 경계를 세우는 것이 서로에게 더 건강한 선택일 때가 많습니다.

제가 이번 일을 돌아보면서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해서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받기 위해 하는 것인가. 두 가지가 같아 보이지만, 내 안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 소외(self-alien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 소외란 자신의 감정과 욕구로부터 멀어져 마치 자기 삶이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프롬은 현대인이 가족 안에서도 이 소외를 경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도, 내가 없어지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것은 진정한 연결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면서 나 자신을 지키는 것. 그 두 가지는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지킬 때 더 오래, 더 진하게 가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용히 알려주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의 가족은 계속됩니다. 스크린처럼 정갈하게 마무리되지 않고, 서운함과 애정이 뒤섞인 채로요. 시어머니와 저 사이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것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 불편함을 '내가 더 잘못한 것'으로만 읽지 않으려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랑의 언어를 가진 두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것으로도 읽어보려 합니다. 프롬이 말한 성숙한 사랑은 어쩌면, 그 다름을 끌어안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함께 생각해볼 질문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는 어디까지 희생해야 할까요?
상대방의 기대를 이해하는 것과 그 기대를 반드시 충족시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가족을 돌보면서도 나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지금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참고: https://namu.wiki/w/%EC%84%B8%EC%83%81%EC%97%90%EC%84%9C%20%EA%B0%80%EC%9E%A5%20%EC%95%84%EB%A6%84%EB%8B%A4%EC%9A%B4%20%EC%9D%B4%EB%B3%84(%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