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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돌보는 삶과 나 자신으로 사는 삶은 반드시 반대일까《오케이 마담2》 × 시몬 드 보부아르

cinema-1 2026. 8. 14. 23:00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저를 기다리고 있던 건 화려한 엔딩 크레딧이 아니었습니다. 쌓인 설거지와 남편의 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안에서 뭔가 작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관 안에서는 분명히 살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집 문을 여는 순간 그 감각이 흐릿해졌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피로감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저는 그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내재성(immanence)과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개념이 그때 불쑥 떠올랐습니다.

영화관 안의 나와 집 안의 나는 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을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장면은 조심스럽게 넘어가겠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이 장면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케이 마담2》에는 평범해 보이는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능력을 꺼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주인공이 대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표정이 너무 낯익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저런 순간이 있었는데" 싶은, 오래된 기억 한 조각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삶을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해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내재성(immanence)입니다. 내재성이란 이미 정해진 역할 안에 머무르는 삶을 뜻합니다. 오늘 청소하고, 내일 또 청소하고, 모레도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삶. 끝나지 않는 반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초월(transcendence)입니다. 초월이란 스스로 목적을 세우고, 자신의 가능성을 바깥으로 펼쳐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초월은 신비로운 무언가가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선택하고, 그 선택이 나를 조금씩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영화관 안에서 저는 분명히 초월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고, 아무것도 제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화면을 바라보며 웃고 긴장하고 조용히 감동받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순간, 저는 다시 내재성의 세계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 전환이 너무 빨랐습니다. 그래서 잠깐 짜증이 났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그 짜증의 정체를 잘 몰랐습니다. 설거지가 싫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재취업 걱정을 내려놓고 겨우 한숨 돌렸다 싶었는데, 그 여유가 채 식기도 전에 익숙한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운했던 겁니다.

가사는 문제가 아니다, 선택권이 없는 것이 문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성이 가사와 돌봄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 외에 다른 선택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출처: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을유문화사).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제가 남편의 출근을 도운 것은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냉장고에 먹을거리를 채워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동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일들이 제 하루의 전부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때, 저는 이런 질문이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있지?"

그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익숙하지 않아서일 겁니다. 수십 년을 가족과 직장 사이에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나"를 물어보는 것이 어색하고 때로는 미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에서는 바로 이 질문을 가장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실존주의란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진다는 사상입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제 삶을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퇴직 이후의 삶이 유독 이 질문을 강하게 불러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역할이 분명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쉬게 되면 그 질문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identity)의 문제입니다. 정체성이란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 그 감각입니다. 이 감각이 흔들릴 때 사람은 불안해집니다. 중장년층은 오랜 역할이 사라지며 이 불안을 느끼고, 청년층은 아직 역할을 찾지 못해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세대가 달라도 이 지점에서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오케이 마담2>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철학사상 이미지

 

초월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선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보부아르의 철학을 "집안일을 버리고 자아를 찾아라"로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해석도 이해는 되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그녀가 말한 초월은 화려한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의 중심에 내가 있는지 여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도 이와 맞닿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출처: 장폴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이학사). 이 말이 처음엔 무겁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지금 제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초월의 한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날 영화관에 가기로 한 선택, 버스 시간을 찾아보고 예매를 누른 그 행동. 작아 보이지만 그것은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퇴직 이후 초월에 가까워지기 위해 제가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는 것들을 솔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 일주일에 한 번은 온전히 저를 위한 시간을 먼저 정합니다. 영화든 산책이든, 그 시간의 주인은 저입니다.
  • 가족을 위해 하는 일과 가족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구분하려 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대신하다 보면 서로의 삶이 지나치게 얽힙니다.
  • 퇴직 이후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나 정해둡니다. 직업이 아니어도 됩니다. 영화 글쓰기도 좋고, 오래 미뤄둔 공부도 좋습니다. 그 선택의 중심에 제가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 세 가지가 대단한 삶의 혁신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저는 그 소박함이 오히려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부아르가 말한 초월도 어쩌면 그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무대 위에 서는 게 아니라, 무대를 선택하는 것.

그날 설거지를 하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나도 나고, 영화관에서 혼자 웃었던 나도 나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나라고. 어느 하나가 진짜 나이고 나머지는 가짜인 게 아닙니다. 이 모든 장면들이 합쳐져서 지금 제 삶이 됩니다.

보부아르가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은 결국 이것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입니까. 저는 이 질문에 아직 완전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오늘 영화관에 다녀왔고,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가족을 돌보는 삶 속에서 나 자신의 선택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 내가 가족을 위해 하는 일 가운데 정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은 무엇일까?
  • 퇴직 이후, 다른 사람을 위한 역할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참고: https://namu.wiki/w/%EC%98%A4%EC%BC%80%EC%9D%B4%20%EB%A7%88%EB%8B%B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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