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도 결국 서로 다른 한 사람을 만나는 관계다《우리들》 × 마르틴 부버
저는 오랫동안 가족이란 주말에는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주말에 남편이 자전거를 타러 나가면 왠지 섭섭했고, 아들이 혼자 게임을 하고 있으면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영화 한 편이 그 생각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습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초등학생들의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아이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피구 게임과 가족 안에서 '역할'로 존재하는 것
《우리들》에는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체육 시간, 피구 팀을 나누기 위해 아이들이 하나씩 선택받는 장면입니다. 주인공 선은 마지막까지 지목되지 못하다가 어쩔 수 없이 팀에 끼게 됩니다. 팀 안에서도 선은 눈치를 살피며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밟지도 않은 선을 밟았다는 이유로 아웃 처리까지 당합니다. 공을 주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 가족 안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엄마', '아내'라는 역할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누군가의 밥을 챙기고, 누군가의 하루를 걱정하고, 가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역할에서 벗어나면 뭔가 잘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개념을 빌려오면 이야기가 조금 선명해집니다. 부버는 인간관계를 '나-그것(I-It)' 관계와 '나-너(I-Thou)'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나-그것' 관계란, 상대를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저 사람은 내가 챙겨야 하는 사람', '저 사람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처럼 상대를 어떤 목적 안에 놓는 것입니다. 반면 '나-너' 관계란 상대를 그 어떤 역할이나 기능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온전히 독립된 한 사람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경험상 느낀 것은 이렇습니다. 가족끼리는 이 '나-그것' 관계에 빠지기 가장 쉬운 사이라는 겁니다. 오래 같이 살았으니까,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보라의 생일 초대와 '나-너' 관계의 어려움
영화에서 선이 보라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선은 보라의 생일 초대장을 주워 건네주고, 보라 무리에 끼고 싶어 대신 청소까지 합니다. 당번 친구들 몫의 청소를 혼자 다 하면서도 기분이 좋습니다. 생일파티에 초대받는다는 것 자체가 소속감(belonging)을 주기 때문입니다. 소속감이란, 어떤 집단에 받아들여지고 싶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보라가 알려준 주소는 보라네 집이 아닙니다. 선은 아무도 없는 낯선 건물 앞에 혼자 서게 됩니다. 정성껏 만든 실팔찌를 손에 쥔 채로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고 부릅니다. 사회적 배제란, 특정 집단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는 경험을 뜻하며, 연구에 따르면 이것이 신체적 고통과 유사한 뇌 반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제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저도 가족 안에서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웠지만, 남편은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고 아들은 방 안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 저는 선처럼 혼자 그 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건 가족이 저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부버의 '나-너' 관계를 가족에 적용할 때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 상대를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 상대의 취향이나 선택이 나를 향한 거부가 아님을 이해하는 것
- 가족이라는 이름이 상대를 통제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선이 전학생 지아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읽힙니다. 선은 지아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름을 물어보고, 보라에게 주려 했던 팔찌를 건넵니다. 기능적 이유 없이 상대에게 다가간 그 순간이, 아마도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나-너' 관계의 장면일 것입니다.

캠핑장 하루와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
이번 주말, 저는 체류형 창업지원센터에서 귀농·귀촌 교육을 함께 받았던 분들과 계곡 캠핑장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체류형 창업지원센터란, 귀농이나 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농촌 지역에 일정 기간 머물며 생활과 창업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날 하루가 생각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누군가의 밥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고, 아들 걱정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텃밭 이야기를 하고, 웃었습니다. 그냥 그곳에 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2023년 귀농·귀촌 인구는 약 49만 명으로, 40~50대의 비율이 전체의 절반을 넘습니다(출처: 농림축산식품부). 이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단순히 '농촌으로 이사한다'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설계하려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입니다.
저도 그 흐름 안에 있습니다. 오랜 직장 생활이 끝나고, 아들의 독립 문제를 고민하고, 귀촌을 준비하며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국선도란 호흡과 명상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전통 수련법으로, 신체 이완과 정신 집중을 동시에 훈련하는 수련입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느낀 뿌듯함은, 아들의 하루를 확인한 날이 아니라 저 자신의 하루를 산 날에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선네 엄마도 비슷하게 읽힙니다. 분식가게와 반찬가게를 운영하느라 지쳐 선의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고 누워 잠이 듭니다. 선은 그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눕습니다. 엄마가 완벽하게 들어주지 못해도 선은 행복합니다. 완벽한 동행이 아니어도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아이의 행동이 조용히 보여줍니다.
가족 간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것이 관계를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의 경험을 했습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낸 주말 이후, 저녁에 가족이 모였을 때 나눈 이야기가 평소보다 훨씬 생생했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하루가 있었으니까요.
가족도 결국 서로 다른 한 사람이 만나는 관계입니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다는 사실이 상대를 모두 안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남편은 자전거를 탈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들은 게임 속에서 무엇을 찾는지, 저는 텃밭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며 무엇을 느끼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을 때 오히려 더 진짜로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하루를 살다가 돌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가족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볼 질문
- 나는 가족 구성원을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기대하는 역할로 바라보고 있을까?
- 가족과 함께하지 않는 시간을 나는 왜 불안하게 느끼는가?
-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지금 내가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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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 관계와 삶의 변화를 철학적으로 생각해 본 내용입니다.
참고: https://namu.wiki/w/%EC%9A%B0%EB%A6%AC%EB%93%A4(%EC%98%81%ED%9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