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와 돌봄 윤리: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어디까지일까요?
시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셨을 때, 저는 허리가 아팠습니다. 단호박을 자르느라 손목도 시큰거렸고, 이삿짐은 아직 방 한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도와드리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것이 잘못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그 경계를 저는 한동안 찾지 못했습니다. 그 감정을 안고 다시 꺼내 본 영화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였습니다.
한 장면에서 멈췄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꽤 오래 전입니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2011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이란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과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모두 받은 작품입니다. 화려한 수식어보다, 저는 영화 초반의 어떤 장면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나데르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아버지를 두고 이란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내 씨민은 딸의 미래를 위해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 모두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 대화가 법정 다툼으로까지 번졌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나데르의 선택은 단순한 효심이 아닙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혼자 남겨두는 일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화면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 줍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씨민의 시간을 붙잡았고, 딸 테르메의 선택지를 좁혔습니다. 돌봄은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조용히 잠가 버릴 수 있습니다.

돌봄 윤리가 묻는 것
여기서 돌봄 윤리(Care Ethics)라는 개념을 잠깐 소개하려 합니다. 돌봄 윤리란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윤리적 판단의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적 관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아가면서도 언제든 돌봄을 주거나 받는 위치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조앤 트론토는 이 돌봄을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닌 사회적 실천으로 다루었습니다(출처: Joan Tronto, 『Moral Boundaries: A Political Argument for an Ethic of Care』). 트론토에 따르면 좋은 돌봄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 누군가에게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
- 그 책임을 내가 맡겠다고 결정하는 일
- 실제로 적절한 방식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일
- 그 돌봄이 상대방에게 실제로 닿았는지 확인하는 일
솔직히 처음에는 이 목록이 너무 교과서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전화를 떠올렸을 때, 저는 1번과 2번 사이에서 멈춰 있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이 지금 이 순간 제 몫인지, 저는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나데르는 어떻습니까. 그는 1번부터 3번까지 매우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아버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책임을 지겠다고 결심하고, 돌봄 노동자를 고용하는 실질적인 조치까지 취합니다. 그런데 4번, 즉 그 돌봄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고용된 돌봄 노동자에게는 그녀 자신의 경제적 사정과 종교적 제약이 있었고,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집니다. 상호의존성이란 우리가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구조 자체를 가리킵니다. 나 혼자 완전히 자립한 존재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의존의 망 안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 돌봄 노동자는 그 망의 가장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요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저는 이 질문과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가족이니까 해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의 몸과 형편으로는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마음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를 죄책감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캐롤 길리건은 그의 저서 『다른 목소리로』에서 돌봄의 윤리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출처: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자신을 소진시키는 돌봄은 결국 지속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오래 돌보기 위한 조건입니다.
제가 인력을 구해 마무리하시라고 말씀드린 것이, 돌아보면 꼭 포기가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직접 손을 보태지 못하는 대신 다른 경로를 찾은 것이고, 다음 김장 때 직접 심은 작물을 보내겠다는 약속은 지금 가능한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겠다는 의사였습니다. 돌봄은 항상 같은 형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씨민은 이기적인 사람이었을까요. 나데르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요. 영화는 끝까지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정직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희생(Self-sacrifice)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자기희생이란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것을 미덕으로 가르쳐 왔습니다. 특히 가족을 향한 희생은 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자기희생이 구조적으로 특정한 사람에게만 반복될 때,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불평등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씨민이 가장 아프게 느껴집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새 출발이었지만, 영화가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은 주로 이기적인 선택을 한 아내입니다. 그 시선 자체가 하나의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대답보다 질문을 남겨 놓습니다. 나데르의 아버지처럼 기억을 잃어가는 누군가 곁에 있어 본 분이라면, 혹은 씨민처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었던 적이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제가 돌보는 사람인지 돌봄을 유보하는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이 전부를 희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면서요.
생각해 볼 질문 3가지
- 가족을 도와드리지 못했을 때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책임과 스스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의무를 구분해 볼 수 있을까요?
- 가족을 돌보는 일에서 한 사람에게 노동과 책임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으신가요? 필요한 돌봄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도움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 다른 사람의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것만큼 자신의 건강과 생계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참고자료
[영화 자료]
Sony Pictures Entertainment, A Separation 공식 작품 소개
https://www.sonypictures.com/movies/aseparation
[철학 자료]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Care Ethics”
https://iep.utm.edu/care-ethics/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Care Ethics” — 조앤 트론토의 돌봄 윤리와 돌봄 과정에 대한 설명
https://iep.utm.edu/care-eth/
※ 본 글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서사와 현대 돌봄 윤리를 연결해 해석한 글입니다. 영화가 조앤 트론토의 철학을 직접 각색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