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둔 여름》 × 미셸 푸코: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가
평일 아침에 극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날 저를 조금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나이대의 분들이 보였고, 다들 저처럼 조용히 앉아 스크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극장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그 작은 의문이 영화가 끝난 뒤 훨씬 더 큰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구의 허락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스캔들이 아니라 시선이 그들을 무너뜨렸다
이미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영화를 먼저 보신 뒤 이 글로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1810년, 에든버러의 두 여성 교사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갑니다. 그들이 누군가를 해친 것도, 법을 어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생 하나가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그 말 한마디가 소문이 되고, 소문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결국 두 사람의 삶 전체를 덮어버립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파괴한 건 학생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인 사회의 준비된 시선이었다고. 이미 그들을 문제로 바라볼 틀이 있었고, 그 틀에 말 한마디가 끼어들었을 뿐입니다.
소피 헬드만 감독은 이 이야기를 법정 드라마나 고발의 방식으로 풀지 않습니다. 대신 두 사람이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는 몸짓을 천천히 따라갑니다. 그 몸짓이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섹션에서 이 작품이 선택된 이유가, 바로 그 조용한 응시 방식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출처: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 프로그램).
푸코가 말한 '정상화 권력'이란 무엇인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자연스럽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떠올랐습니다.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한 철학자입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정상화 권력(Normalizing Power)이었습니다. 정상화 권력이란 사회가 '이것이 정상'이라는 기준을 먼저 만들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자동으로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방식의 지배를 뜻합니다. 법이나 감옥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더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 기준을 스스로 내면화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묻습니다.
- 이 나이에 이런 선택을 해도 되는 걸까?
- 직장이 없으면 나는 어떤 사람인 걸까?
- 결혼을 아직도 안 했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 SNS에 올린 내 모습이 남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그날 극장에 앉으면서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평일 아침에 영화를 봐도 되는 사람인가.'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 제가 먼저 제 자신을 심판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그게 푸코가 말한 정상화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출처: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한국어판)).
직업이 사라지면 나는 누구인가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제가 이번에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장면은, 두 여성이 사회의 시선 앞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 살아가는 사람, 서로를 아끼는 사람. 그런데 사회는 그 복잡한 사람을 딱 하나의 이름으로 묶으려 합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한동안 직장을 잃었을 때의 기분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계약이 끝나고 나서 누군가 "요즘 뭐 하세요?"라고 물었을 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직업이 있을 때는 그 말 한마디로 저를 설명할 수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자 마치 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역설입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본질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철학적 입장으로, 우리가 어떤 역할이나 정의보다 먼저 그냥 존재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자꾸 역할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직업, 나이, 결혼 여부, 경제적 상황. 그 역할이 흔들리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찾아옵니다.
돌이켜보면 그 감각은 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회가 저에게 심어놓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제 안에 설치된 감시자의 눈으로 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판단한다
1810년의 에든버러와 오늘의 우리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시선이 이제는 없어졌을까요. 형태만 달라졌을 뿐, 우리도 여전히 서로를 기준 안에서 바라봅니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눈 철학자입니다. 하나는 상대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만나는 '나-너(I-Thou)'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역할이나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나-그것(I-It)' 관계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직업, 나이, 결혼 여부로 먼저 분류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나-그것'의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묻어둔 여름》의 두 여성에게 사회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관계, 두려움, 용기, 신뢰 같은 것들은 지워지고, 그 자리에 딱 하나의 판단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두 사람의 삶을 바꿔버렸습니다.
오늘날의 SNS는 어떨까요. 짧은 글 하나, 사진 한 장. 우리는 그것만 보고도 한 사람을 다 안다고 느낍니다. 맥락 없이 분류합니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보니, 우리가 누군가를 '나-그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분명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날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저는 한참 걷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그 질문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묻어둔 여름》은 1810년의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지만, 보고 나면 영화관 밖의 시간을 다르게 걷게 됩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에 한 박자 멈추게 되고,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 앞에서 '이게 정말 당연한 건가?'라는 질문이 자꾸 올라옵니다. 평일 아침에 극장에 앉아 있어도 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저처럼,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는 기준 앞에 서 있습니다. 그 기준을 의심하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조용히 권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함께 생각해볼 질문
- 나는 다른 사람을 사회가 만든 기준으로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 지금 내가 당연하다고 믿는 ‘정상적인 삶’의 기준은 과연 누가 만든 것일까?
- 사회가 정한 시간표에서 잠시 벗어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