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킹》으로 읽는 권력과 욕망 (니체의 권력 의지, 무위, 실존)
✔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
왜 인간은 권력을 가지면 변하는가
니체가 말한 ‘권력 의지’란 무엇인가
영화 《더 킹》이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성공 이후 더 공허해지는 인간 심리
현대 사회에서 권력과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
"권력은 인간을 타락시킨다." 오래된 명제입니다. 그런데 《더 킹》은 이 명제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타락이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이미 안에 있던 무언가를 끌어올린다고 이 영화는 말합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잘 만든 정치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로 봤을 때, 박태수의 눈빛이 달라 보였습니다.
이 영화가 품은 철학적 질문 — 권력은 인간을 만드는가, 드러내는가
박태수는 처음부터 악인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무시당하고, 세상의 규칙을 일찍 눈치챈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검사가 되고 권력의 핵심에 가까워질수록, 영화는 그의 변화를 조용하고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어느 시점부터 저는 이 영화가 태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떤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철학적으로 이 질문은 오래된 것입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인간은 여전히 선한 행동을 선택할 것인가. 권력이나 익명성이라는 조건이 생겼을 때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더 킹》의 조직 문화, 그 끈끈하고 위계적인 검사 집단에 그대로 겹쳐집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내부에서는 서열과 거래가 움직입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의미심장합니다. 화려한 공간과 어두운 밀실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구도는, 도덕적 외피와 본능적 욕망이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 구조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것처럼 읽힙니다.
동양 사상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존재했습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며, 예(禮)와 교육을 통해서만 바른 방향으로 교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닙니다. 성악설이란,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충동이 방치될 경우 반드시 충돌과 혼란으로 이어진다는 사유로, 그러므로 사회 제도와 도덕 규범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을 향합니다. 영화 속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제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제도가 있어도 그것이 욕망을 통제하기보다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니체의 권력 의지(Wille zur Macht)가 개입합니다. 권력 의지란 단순히 타인을 지배하려는 충동이 아닙니다. 니체가 말한 권력 의지는 인간이 더 강해지려 하고, 더 많이 인정받으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려는 근본적인 생의 충동 전체를 가리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니체는 이 욕망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그것을 위선적으로 포장하는 방식에 있다고 봤습니다. 태수가 검사 선서를 외우는 장면과 그가 밤의 세계에서 거래하는 장면이 이 영화 안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정치는 결과만 중요할까
→ 《킹메이커》 × 마키아벨리
2️⃣ 인간은 왜 같은 욕망을 반복할까
→ 《26년》 × 니체
3️⃣ 폭력의 시대 속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 《박하사탕》 × 사르트르
동서양 사상가의 답변 비교 —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멈칫했던 순간은, 태수가 권력을 손에 넣은 이후에도 불안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더 많이 가졌는데, 왜 더 불안해지는 걸까. 이 역설이 영화 후반부를 관통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욕망의 내러티브(narrative)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소멸하지 않고, 더 큰 욕망으로 이동합니다. 한 번의 성공은 다음 성공을 향한 허기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는 번아웃, 성공 이후 공허함의 구조입니다. 니체는 스스로의 욕망을 직시하고 그것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인간, 즉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반대가 바로 욕망은 숨기고 도덕의 언어로 자신을 포장하는 위선적 인간형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동양 철학은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합니다.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이 흥미롭게 겹쳐집니다.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무위란 억지로 통제하거나 욕망을 강제로 채우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덕경』 44장에는 "지족자부(知足者富)", 즉 만족을 아는 자가 부유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태수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이 '만족을 아는 것'입니다.
두 사상의 시선을 나란히 놓으면 흥미로운 대조가 생깁니다.
- 니체의 관점: 욕망 자체를 긍정하라. 다만 그것을 위선으로 포장하지 말고, 욕망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힘의 인간'이 되어라.
- 노자의 관점: 욕망의 확장 자체를 멈춰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에서, 강함이 아니라 부드러움 안에서 진정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 순자의 관점: 욕망은 제어될 수 있으나, 그 제어는 내면이 아닌 사회적 예법과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세 가지 시선 모두 《더 킹》의 박태수가 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각자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니체라면 태수가 욕망에 정직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노자라면 그가 애초에 멈출 줄 몰랐다고 말할 것이며, 순자라면 그가 속한 제도 자체가 이미 부패했다고 말할 겁니다.
영화 속 검사 조직의 내러티브(narrative)는 결국 이 세 가지 문제가 동시에 작동한 결과입니다. 국내 영화진흥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더 킹》은 개봉 당시 약 5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수치는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떤 집단적 정서를 건드렸음을 반증합니다. 권력, 조직, 욕망이라는 이 영화의 키워드는 특정 시대나 특정 직업군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머문 질문은 이것입니다. 권력을 얻은 이후의 박태수는 새로운 인간이 된 걸까요, 아니면 원래의 인간이 된 걸까요. 어쩌면 니체도, 노자도, 순자도 같은 질문 앞에서 조금씩 다른 침묵을 남겼을 것입니다.
권력 앞에서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다는 것, 그게 영화 《더 킹》이 남기는 가장 불편하고 정직한 메시지일 겁니다. 그 불편함이 오래가는 영화일수록, 철학에 더 가까운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질문
나는 권력을 얼마나 욕망하고 있는가?
권력을 가지면 정말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인간은 왜 인정받고 싶어 하는가?
참고: https://namu.wiki/w/%EB%8D%94%20%ED%82%B9(%EC%98%81%ED%99%94)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ietzsche/
https://www.kobi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