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와 미셸푸코— 우리는 지금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어느 날 아침, 스마트폰 알림을 끄면서 문득 멈췄습니다. 어젯밤 제가 검색했던 단어들이 오늘 피드에 광고로 떠 있었고, 며칠 전 친구와 나눈 대화 주제가 추천 콘텐츠로 줄지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 〈1984〉의 텔레스크린이 떠올랐습니다. 조지 오웰이 그린 감시 장치와 제 손 안의 화면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 그 불편함이 이 글을 쓰게 했습니다.
텔레스크린이 꺼지지 않는 세계
마이클 래드퍼드 감독이 연출한 1984년작 〈1984〉는, 오웰의 소설이 출판된 지 35년이 지난 해에 완성됐습니다. 그 타이밍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알레고리(allegory)였습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의 이야기 아래 다른 층위의 의미를 숨겨두는 서사 방식으로, 이 영화는 독재 국가를 그리는 척하며 실은 권력이 인간 존재에 침투하는 방식을 정밀하게 해부합니다.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을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암전된 화면에서 선전 영상이 터져나오고, 시민들은 그것을 향해 함성을 지릅니다. 그 장면의 미장센(mise-en-scène)이 먼저 몸을 눌러왔습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세트 디자인 등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를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래드퍼드는 오세아니아를 잿빛과 갈색으로만 채웠고,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존 허트 분)의 얼굴에는 언제나 불안과 피로가 겹쳐 있습니다. 그 억눌린 화면 톤 자체가 이미 하나의 통제입니다.
텔레스크린은 끄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집 안 구석구석을 감시하며, 시민들은 자는 동안에도 감시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폭력 장면이 아니라,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에서 멀어진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일기를 쓰는 장면입니다. 그 조심스러운 손떨림.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미 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몸짓이었습니다.
판옵티콘, 혹은 스스로를 가두는 눈
이 장면은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분석한 판옵티콘(Panopticon) 개념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판옵티콘이란 18세기 영국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으로, 중앙의 감시탑 하나가 모든 독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출처: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1975
여기서 핵심은 실제 감시 여부가 아닙니다. 죄수는 감시탑 안이 비어 있는지 가득 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불확실성이 감시를 내면화하게 만듭니다. "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인간은 스스로 행동을 조정합니다. 푸코는 이것을 규율 권력(disciplinary power)이라 불렀습니다. 규율 권력이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새겨진 행동 규범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 방식입니다.
윈스턴이 텔레스크린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는 장면, 생각을 들킬까 봐 눈을 내리까는 장면들은 이 규율 권력이 이미 완성된 인간의 초상입니다. 그는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감시탑을 등 뒤에 달고 살아갑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SNS에 글을 올리기 전에 머릿속으로 한 번 검열을 합니다. "이게 오해받지 않을까", "누군가 스크린샷을 찍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 때, 저는 이미 텔레스크린을 내면에 달고 있는 셈입니다. 〈1984〉를 처음 볼 때는 저 세계가 낯설었는데, 다시 볼 때는 무언가 익숙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언어가 사라지면 생각도 사라지는가
〈1984〉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설정은 뉴스피크(Newspeak)입니다. 오세아니아 정부는 매년 어휘 목록을 줄입니다. '자유', '저항', '비판' 같은 단어를 체계적으로 제거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단어가 없으면 그 단어로 형성되는 개념도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푸코의 담론 이론(discourse theory)은 이 설정에 철학적 뼈대를 제공합니다. 담론 이론이란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언어와 지식의 체계가 곧 권력의 형태라는 관점입니다. 출처: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Michel Foucault' 즉, 권력은 법과 폭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담론을 통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조각합니다.
영화 속에서 뉴스피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사임의 얼굴에는 묘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유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학적 작업으로 여깁니다. 그 순간 저는 담론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느꼈습니다.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믿어서 복종할 때, 권력은 가장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현대의 뉴스피크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단어를 제거하기보다 단어를 과잉 생산합니다. 매일 수백 개의 키워드가 트렌드로 올라오고, 하루도 안 돼 사라집니다. 선관위 투표 용지 사태가 한바탕 세상을 뒤집더니, 며칠 후 스포츠 중계 하나로 흔적도 없이 희미해지는 것처럼요. 기억이 약해질수록 권력과 여론이 인간을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오웰의 직관은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담론 통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떠올려보면 이런 패턴들이 보입니다.
-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만 반복적으로 소비하게 된다
- 반박 의견보다 동의 의견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구조 속에서 산다
- 빠른 속도의 정보 소비가 깊이 있는 사유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기본값으로 만든다
이것이 쇠사슬 없는 텔레스크린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돌이켜봐도 오래된 영화지만 현대사회를 정확하게 비판하고 있는 작가의 통찰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84〉는 독재를 고발하는 영화로 읽힐 수 있지만, 저에게는 오히려 "나는 지금 내 언어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묻는 영화였습니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권력은 바깥에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 안에서 작동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텔레스크린을 끄고 싶다면, 먼저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시작일지 모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철학 영화 이야기
1️⃣ 《브이 포 벤데타》 × 미셸 푸코
→ 권력은 어떻게 인간을 통제하는가
2️⃣ 《트루먼 쇼》 × 플라톤
→ 감시는 왜 인간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가
3️⃣ 《1987》 × 하버마스
→ 민주주의는 왜 시민의 대화 위에서 유지되는가
🔎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생각하고 있는가?
SNS 시대의 자유는 진짜 자유일까?
권력은 왜 언어와 정보를 통제하려 하는가?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왜 위험해질 수 있을까?
참고: - 출처: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