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JSA〉와 레비나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적은 사라졌다
적을 죽이는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아니,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적'이었는가. 〈공동경비구역 JSA〉는 바로 그 질문을 총성 대신 초코파이 하나로 꺼내듭니다. 2000년 개봉 당시, 저는 이 영화가 스릴러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암전된 화면이 켜지고 자막이 올라가던 그 순간, 가슴속에 남은 것은 범인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서로를 죽여야 했을까"라는, 답이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판문점의 미장센, 혹은 분단이 만든 시각 질서
영화는 처음부터 공간으로 말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 이 영화의 첫 번째 언어입니다. 미장센이란 카메라 앵글, 조명, 배우의 위치, 소품 배치 등 화면 안에 구성된 모든 시각 요소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JSA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으로 쓰지 않습니다.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은 화면을 물리적으로 나누는 선이면서, 동시에 "누가 인간이고 누가 적인가"를 결정짓는 상징적 경계선으로 기능합니다.
이수혁(이병헌)과 오경필(송강호)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두 사람은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합니다. 그 순간의 카메라는 기묘하게 중립적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아닌 그 경계 위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봅니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영화가 가진 알레고리(allegory) 역시 여기서 시작됩니다. 알레고리란 표면적인 서사 이면에 또 다른 의미층이 존재하는 서술 방식입니다. 〈JSA〉의 표면은 총격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이지만, 그 아래에는 분단 체제 자체가 어떻게 인간을 '적'이라는 기호로 환원하는가에 대한 알레고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분단 드라마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레비나스의 얼굴, 초코파이 너머에 있던 것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윤리학의 출발점을 아주 단순한 장면에서 찾았습니다. 타자의 얼굴(the face of the Other)을 마주하는 순간. 그는 이 얼굴을 단순한 생김새가 아니라, 상대가 고통받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전해지는 통로로 이해했습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타인을 집단이나 이념으로 먼저 볼 때 폭력은 정당화되고, 반대로 그 얼굴을 직접 마주할 때 비로소 윤리적 관계가 열립니다. 출처: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Totality and Infinity, 1961
〈JSA〉의 가장 빛나는 장면은 거창한 정치 대화가 아닙니다. 오경필이 이수혁에게 초코파이를 건네는 순간, 두 사람이 군복을 입은 채 별것 아닌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들입니다. 바로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남한군'과 '북한군'이라는 기호가 잠깐 사라집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얼굴의 노출이 거기서 일어납니다. 상대가 외롭고, 웃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알게 되는 것.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도 주목할 맥락이 있습니다. 2000년은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해입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직접 얼굴을 마주한 그해, 박찬욱은 정치보다 훨씬 앞선 차원에서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평화의 출발이 선언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 있을지 모른다고. 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공동경비구역 JSA〉 작품 정보
비극은 총이 아니라 시스템에서 왔다
저는 오래 이 영화의 비극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총격 장면을 비극의 원인으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총은 결과였습니다. 진짜 비극은 그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남북 군인들의 우정이 발각되는 순간, 시스템이 그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이 구조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이 말하는 '상황의 폭력'과 닿아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보는 철학적 입장인데, 역설적으로 그 자유는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에서만 주어집니다. 이수혁과 오경필이 아무리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봐도, 그들이 서 있는 군사분계선이라는 '상황'은 그 인식을 끝내 범죄로 만들어버립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본 건, 사실 남북 문제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녀와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느 날 밤, 저는 묘하게 이수혁과 오경필을 떠올렸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아니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욱 적처럼 대하게 되는 순간들. 분단의 비극이 그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 영화가 더 날카롭게 읽히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 SNS에서 의견이 다를 때 인간이 아닌 '저쪽 진영'으로 규정하기
- 얼굴 없는 텍스트로만 상대를 접하며 공감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기
-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을 지워버리고, 그 집단 전체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기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점점 더 서로의 얼굴을 지우고 있습니다. 〈JSA〉의 비극이 2000년의 한반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인 까닭입니다.
자막이 다 올라가고 나서도 극장을 쉽게 나서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가 끝낸 것은 이야기였지만, 영화가 열어놓은 것은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얼마나 자주 지우며 살고 있는가. 6·15 선언 26주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남북관계를 보면서, 저는 여전히 그 질문이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는 어쩌면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상대를 이념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아주 작은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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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웰컴 투 동막골》 ×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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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극기 휘날리며》 × 한나 아렌트
→ 전쟁은 왜 인간성을 무너뜨리는가
3️⃣ 《1987》 × 하버마스
→ 민주주의는 왜 시민의 대화가 멈출 때 흔들리는가
🔎 생각해볼 질문
우리는 상대를 얼마나 쉽게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화는 정치 협상만으로 가능할까?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도 공존은 가능할까?
참고: - 출처: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