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행복론과 어바웃 타임 (아타락시아, 평온, 욕망)
솔직히 저는 에피쿠로스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쾌락주의'라는 단어만 보고 방탕하게 살라는 철학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의 철학을 제대로 들여다보니 정반대였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철학이더군요. 주식시장이 6000포인트를 넘어섰다는 플랭카드가 거리에 넘쳐나고, 전철에서는 모두가 휴대폰으로 시황을 들여다보는 지금, 저 역시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욕망이 멈추지 않는 시대, 에피쿠로스를 다시 보다
헬레니즘 시대는 전쟁의 피로감 속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시기였습니다. 그 시절 등장한 에피쿠로스 학파는 끝없는 전쟁과 혼란 속에서 평온을 찾는 방법을 제시했죠. 지금 역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국제사회에서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 목격한 풍경은 더 직접적이었습니다. 국내 주식시장이 폭등하면서 주변 사람들이너도나도 주식에 올인하는 모습들이었거든요. AI를 활용해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광고가 유튜브와 SNS를 도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올인(all-in)'이란 투자 가능한 자산 전부를 한 곳에 쏟아붓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저 혼자만 뒤처진 것 같은 조바심이 밀려왔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명쾌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는 욕망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요(출처: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
- 자연적이고 필요한 욕망: 생존을 위한 음식, 물, 안전
- 자연적이지만 불필요한 욕망: 사치스러운 음식, 화려한 집
- 자연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명예, 권력, 타인의 인정
저는 제 욕망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카테고리에 집중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더 좋은 차, 더 넓은 집,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성공...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생존과 무관한 욕망이었던 거죠.
아타락시아, 마음의 평정이라는 목표
에피쿠로스가 제시한 핵심 개념은 '아타락시아(ataraxia)'입니다. 여기서 아타락시아란 마음이 어떤 외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한 무감각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죠.
About Time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저는 이 개념을 더 생생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팀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입니다. 처음에는 실수를 고치고 더 완벽한 선택을 하기 위해 이 능력을 사용하죠. 소개팅을 다시 하고, 어색했던 대화를 수정하고, 불완전했던 순간들을 고쳐나갑니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는 건 이겁니다. 완벽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영화 후반부에서 팀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대신 처음부터 지금 이 순간을 충분히 살아내는 법을 선택하죠.
제가 경험한 바로도 이게 정답이었습니다. 일을 계속하면서 돈을 벌어도, 더 좋은 직장으로 가기 위해 자격증을 계속 취득해도,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더군요. 행복의 기준선이 계속 높아지면서 다음 목표가 또 생기는 겁니다. 에피쿠로스가 경고했던 '헛된 욕망의 무한반복'을 제가 직접 체험한 셈이었죠.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의 구분
에피쿠로스는 "물과 빵만 있으면 신과 행복을 겨룰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너무 금욕적으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건 가난하게 살라는 게 아니었어요. 최소한의 것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의미였죠.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도 연결됩니다. 여기서 한계효용이란 소비 단위가 늘어날 때마다 추가로 얻는 만족도를 뜻하는데요. 첫 번째 빵은 배고픔을 해결하지만, 열 번째 빵은 그다지 큰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원리입니다(출처: 한국경제연구원).
저는 이 원리를 일상에서 확인했습니다. 월급이 오를 때마다 처음에는 기뻤지만, 그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더 높은 수입을 원하게 되더군요. 에피쿠로스가 말한 '필요한 욕망'의 기준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가진 사람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종종 멈춰서 질문해봅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타인과의 비교에서 나온 욕망인가 하고요.
평온을 선택한 삶의 방식
에피쿠로스는 정치적 성공이나 사회적 명예 대신 작은 정원에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학파는 '정원의 철학'이라고도 불렸는데요. 여기서 '정원(garden)'이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 선택이 도피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죠.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승진 기회가 있었지만, 그 자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와 개인 시간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현재 위치를 유지하기로 했어요.
주변에서는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했지만, 저는 그 결정이 후회되지 않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 가족과 보내는 시간, 책을 읽고 생각할 여유... 이런 것들이 제게는 더 큰 가치였거든요. 에피쿠로스가 말한 '아포니아(aponia)', 즉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없는 상태에 가까워진 셈이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더 빨리를 요구합니다. AI 활용 능력이 없으면 도태된다는 식의 불안 마케팅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행복의 기준은 크기나 강렬함이 아니었어요. 지금 이 순간 고통 없이 평온한가, 그게 전부였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건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충분히 살아낸 오늘입니다. 에피쿠로스가 2300년 전에 했던 말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인간의 욕망 구조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행복의 기준은 결국 내 마음의 평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 이걸 깨닫는 데 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조금씩 실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