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idden Life로 보는 자연법과 양심 (토마스 아퀴나스, 이성과 신앙, 도덕적 판단)
2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한 농부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다가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란츠 예거슈테터. 테렌스 말릭 감독의 영화 'A Hidden Life'는 이 실화를 다룹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법이 명백히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사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평생 탐구했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자연법 - 이성으로 파악하는 도덕의 질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그의 저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신학의 근간을 이룹니다(출처: 가톨릭 백과사전).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적 철학을 기독교 신학과 결합하여 독특한 사상 체계를 만들어냈습니다.
아퀴나스가 제시한 자연법(Natural Law)이란 인간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 원리를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법이란 신의 계시나 종교적 믿음 없이도 인간의 이성만으로 알 수 있는 선과 악의 기본 원칙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누군가를 해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굳이 성경을 읽지 않아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아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저는 가끔 새벽에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멈춰 서곤 합니다. 솔직히 이건 법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는 이것을 양심(Conscientia)이라고 불렀습니다. 양심은 자연법을 개별 상황에 적용하는 실천 이성의 작용입니다. 즉, 양심이란 추상적인 도덕 원리를 구체적인 행동 상황에서 적용하여 "이건 해야 한다" 또는 "이건 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는 내면의 능력을 뜻합니다.
아퀴나스는 법을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 영원법(Eternal Law): 신의 섭리에 따른 우주의 질서
- 자연법(Natural Law): 인간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도덕 원리
- 인정법(Human Law): 국가나 사회가 제정한 실정법
- 신법(Divine Law): 성경 등 계시를 통해 알려진 신의 법
이 구분에서 핵심은 인정법, 즉 국가의 법이 자연법에 어긋날 경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퀴나스는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라 폭력의 일종"이라고 명확히 선언했습니다(출처: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이 문장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철저한 논리적 추론의 결과입니다.
이성과 신앙의 조화 - 영화 속에서 만난 양심의 용기
중세 1000년을 흔히 암흑시대라고 부르지만, 아퀴나스의 업적은 오히려 이성의 복권이었습니다. 그 이전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신플라톤주의는 "이성은 신앙의 시녀"라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여 이성과 신앙이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와 속성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화 'A Hidden Life'의 주인공 프란츠는 광신자가 아닙니다. 그는 조용히 사색하고, 깊이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립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아퀴나스의 철학과 연결점을 발견했습니다. 프란츠의 선택은 맹목적 신앙이 아니라 이성적 숙고의 결과입니다. 나치 정권이라는 인정법이 명백히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판단, 그리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양심의 결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저도 직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사가 명백히 불법적인 지시를 내렸을 때, 법적으로는 따라야 할 것 같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경고음이 울렸습니다. 결국 저는 거부했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퀴나스가 말한 양심의 작동 방식입니다.
아퀴나스는 인간을 목적론적 존재로 봤습니다. 여기서 목적론(Teleology)이란 모든 존재가 고유한 목적과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철학적 관점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씨앗의 목적은 나무로 자라는 것이고, 인간의 최종 목적은 선 그 자체, 궁극적으로는 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향한 선택은 결과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행위입니다.
프란츠의 선택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고, 당시엔 거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행위는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선을 향한 의지의 방향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결과주의 윤리학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입니다.
요즘 생성형 AI가 모든 질문에 답을 내놓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저는 AI에게 도덕적 판단을 맡기는 것이 위험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판단은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라, 자연법에 대한 내면의 인식과 양심의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데이터로 학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매일 작은 선택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회사에서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모두가 침묵할 때, 불의에 눈감는 것이 더 편할 때. 그때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내가 따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아퀴나스는 그 답이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양심이 불편해지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자연법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따를 용기가 있느냐는 것뿐입니다.
저도 교회를 다니지 않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마다 이것이 단순한 사회적 학습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아퀴나스가 말한 대로, 우리 안에는 이성을 통해 파악 가능한 보편적 도덕 질서가 새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무시하고 살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도록 설계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이렇게 묻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는 조용히 답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엄이다." 법이 틀렸을 때, 우리에게는 여전히 자연법이 있고, 양심이 있으며, 이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는 용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상대주의가 만연하고 모든 가치가 흔들리는 시대에, 아퀴나스의 자연법 사상은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