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매트릭스 (진실, 무지, 선택)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소크라테스를 배우면서 대부분 졸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렵고 지루한 이야기가 떠올랐거든요. 그런데 성인이 되어 매트릭스를 다시 봤을 때,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하는 그 장면에서 묘한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2500년 전 아테네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던 소크라테스와 가상 현실 속에서 진실을 선택한 네오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요. 테스형이라는 유행가 가사에까지 등장할 만큼 유명한 철학자의 사상이, 사실은 우리 일상과 맞닿아 있는 절실한 질문이었던 겁니다.
당신은 지금 진짜를 보고 있습니까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두 개의 약을 내밀 때, 저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까지의 편안한 일상이 계속됩니다. 빨간 약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알게 되죠.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했고, 그가 살던 세계가 거대한 가상 시스템이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합니다.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왜 그렇게 믿는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던 생각들이 사실은 한 번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믿음일 뿐이라는 걸 드러냈죠. 이걸 산파술이라고 부릅니다. 산파가 아이를 꺼내듯, 질문을 통해 상대방 안에 숨겨진 진실을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인데, 요즘은 전화번호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스마트폰에 다 저장되어 있으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몇 개 안 되는 번호뿐입니다. 이런 삶이 편한가요? 당연히 편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물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진짜로 알고 있는 게 맞습니까?"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걸 기계에 맡기고 있습니다. 생각도, 기억도, 판단도요.
무지를 아는 것이 진짜 앎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이걸 단순히 자기 주제 파악이나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게 진정한 앎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장이 처음에는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의미가 느껴집니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은 자신이 가짜 세계에 산다는 걸 몰랐습니다. 아니, 의심조차 하지 않았죠.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알던 세계가 진짜가 아니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이게 바로 무지의 자각입니다. 모르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른다는 걸 아는 상태로 넘어가는 순간이죠.
저는 뉴스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정보가 정말 사실일까? 누군가의 의도가 들어간 건 아닐까? 요즘처럼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시대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매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들,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들을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이건 피곤한 일입니다. 그냥 편하게 믿고 사는 게 훨씬 쉽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삶을 "살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성찰 없는 삶은 위험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죠. 그는 도망칠 기회가 있었지만 거부했습니다. "진리를 포기하고 사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선택이었습니다. 네오가 편안한 무지를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을 선택한 것과 똑같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선택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도 가끔 불편한 진실보다 편한 거짓 앞에서 눈을 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소크라테스의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 말이 처음에는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게가 느껴집니다.
일반적으로 철학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철학은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자신만의 생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에게 사고를 맡길 것인가, 스스로 생각할 것인가. 편리함을 선택할 것인가,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추구할 것인가. 소크라테스와 매트릭스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하나입니다. 당신은 어떤 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머지않아 부모님, 형제, 친구들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기계처럼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미 전화번호를 잊어버린 것처럼요. 그래서 더욱 소크라테스의 삶의 철학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삶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2400년 전 철학자의 질문을 다시 꺼내 든 작품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약을 들고 있을까요? 당연하게 믿는 생각을 한 번 의심해 보고,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불편하더라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이유도, 네오가 빨간 약을 선택한 이유도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고통이 무지 속의 평온보다 낫다는 믿음 말입니다.